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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 2020-08-03 10:10:26

    수정 : 2020-08-03 15:23:31

21세기 신(新)군사학개론

2020-08-03 10:10:26



21세기 신(新)군사학개론
[2020년 8월호 vol.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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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노동법률]한준기 IGM세계경영연구원 교수


    01. '야전교범'보다 중요했던 新군사학개론 노트 

    그 해 겨울바람은 유독 매섭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3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양 어깨에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한 겨울에 최전방부대로 소대장 보임을 받고 떠나는 아들에게 아버지께서는 한 장의 메모를 건네주셨다. 영하 20도 이하의 기온에 칼바람이 몰아치는 혹한의 그곳. 당신의 눈에는 한없이 어린 아이처럼만 보였던 아들을 수십 명의 젊은 병사들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험난한 세상 속으로 떠나보내야만 하셨으니 '이 아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에 마음 한켠이 못내 불안하셨던 모양이다. 자식들에게, 특히 아들들에게는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준다. 장남인 내게는 더욱 그러하다. 특히 젊은 시절 육군장교라는 같은 길을 먼저 걸으셨던 아버지이셨기에. 돌이켜보니 난 잔소리와 견책의 목소리가 아닌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성장을 했다.  

    아버지의 글씨는 누가 보아도 명필이다. 그 필체로 메모지에는 일곱 가지 '근무요령'이 적혀있었다. 

    1. 정확한 상황판단에 의한 업무 수행
    2. 일일 업무 점검
    3. 상관의 관심사항 파악/실행 중점
    4. 대인관계 우호적인 언동
    5. 부하의 신상파악
    6. 스스로 모범적이고 겸손한 태도
    7. 관행-의문점은 동료장교/상사에게 수시로 문의하고 
    환경에 적응할 것

    아버지께서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그 의미를 내게 설명해 주셨다. 별 생각 없이 읽어보면 평범한 이야기인 듯 보였다. 사실 철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그리 가슴에 와닿지 않았는데, 국내 대기업을 비롯해 여러 다국적 기업에서 중책을 맡아 30년 가까운 시간동안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커리어를 쌓은 이 시점에서 아버지의 메시지를 읽어보면,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원칙과 철학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무릎을 치게 된다. 

    단 한 장의 짧은 메모였지만 아버지의 경험과 철학이 압축됐기 때문이었으리라. 마치 가장 단순함은 가장 심오함으로부터 비롯됨을 깨우쳤다고 할까. 다양한 비즈니스의 여정 속에서 수많은 선수들을 보았지만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일곱 가지 원칙을 자신의 비즈니스 일상 속에서 꾸준히 실천하는 리더들을 그리 많이 만나지는 못했다. 

    기업 현장에서 오랜 시간 인사책임자로 인재를 선발하고 리더들을 가까이서 숱하게 관리해 본 입장이기에 요즘 들어 더 아버지 메모의 숨어 있는 가치를 새삼 느끼곤 한다. 그래서 불혹(不惑)을 훌쩍 넘기고 지천명(知天命)의 반환점을 돈 지금, 지금 막 커리어를 시작하고자 하는 차세대 리더들에게, 위기의 시대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종종 잊고 기약 없는 버티기 작전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수의 기성세대들에게 감히 일침을 가한다. "당신의 스토리는 무엇인가요"라고. 

    우리는 커리어에서, 리더십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접하는 지혜로운 메시지가 때로는 너무 단순해 보이기에 그리고 잘되려면 더 특별한 조건의 스펙이 필요할 것이라는 잘못된 환상 때문에 지금 바로 여기 있는 성장과 성공의 열쇠를 놓치는 것 같다. 


    02. 이제야 이해되는 아버지의 인생 스토리

    아버지의 눈에는 아들이 아마도 그 후로도 오랫동안 불안해 보였겠지만 적어 주신 '근무요령'을 잘 지키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대과(大過)없이 무사히 3년간의 임무를 마쳤다. 어떠한 즉각적인 큰 깨우침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회에 나와서도 그 메모지를 쉽게 처분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인생의 흔적이 자꾸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때 당신의 스토리를 압축해서 마음으로 담아 주셨던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나 역시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잊을 만하면 이따금씩 부적처럼 그 글을 꺼내 보며 이 쉽지 않은 조직생활 속에서 내 자신이 중심을 잘 잡고 걸어가고 있는지를 체크하곤 했다. 가는 세월에 강산이 거의 세 번이나 변했는데 아직도 그 '좋은 습관'의 노예로 살려고 애쓰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아버지가 걸어왔던 길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가 훌륭한 분 이셨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우치게 됐다. 이제는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거의 다 키운 가장이 된 입장에서 '어떻게 그 불확실했던 혼돈의 시대를 당신께서는 힘들다는 넋두리 한 번 없이 그리도 꿋꿋이 버텨 오셨을까'하는 생각에 가끔은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아직도 힘이 들 때면, 흔들릴 때면, 그리고 이 풍요로움 속에서 '광야의 야성'을 잃어버리려는 나를 발견할 때면 꺼내보는 내 아버지가 자필로 적어준 그 노트는 어느새 리더로서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실천해야 할 주옥같은 원칙이 됐다. 비록 그 메모지는 누렇게 빛깔이 바랬지만 그 속에 있는 내 아버지 특유의 힘 있는 필체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듯, 한 글자 한 글자가 툭툭 튀어나올 듯하고 그 지혜의 메시지는 여전히 내 심장 속에 팍팍 꽂히고 있다. 이제 돌아보니 그 노트는 단순히 '어떻게 일 할 것인가'의 원칙 그 이상을 알려준 내 평생 커리어의 네비게이터 역할을 한 셈이다.  


    03. 우리의 체험적 스토리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  

    풍요의 시대라고 말한다. 선진국의 문 앞에 왔고,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고들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경제위기는 계속되고 승자와 패자의 간극은 더 벌어져버렸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융-복합화로 사람과 사물이 결합되는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변하고 상상 그 이상의 일들이 벌어지기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더 위기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듯하다. 

    작금의 코로나19 사태는 이 현상을 가속화하고 우리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이 불안함 때문인지, 젊은 학생부터 경력이 상당한 샐러리맨들까지 무작정 검증되지 않은 '스펙'을 쌓아보려는 열풍에서 아직까지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기본적인 실력을, 역량을, 전문성을 갖춰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우리들이 경쟁하는 무대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를 넘어 앞날을 알 수 없는 시대에 롱런할 수 있는 힘은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자신만의 스토리를 갖췄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는 개인에게, 조직에게, 그리고 민족에게도 모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영향을 줄 수도 없고 변화시킬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불안해하고 깊이 없는 실력과 스펙을 신경안정제로 복용하는 것은 약효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는 100세 시대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떤 면에서 평범한 보통사람들에게는 더 쉽지 않은 세상이기도 하다. 길어도 50대 초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직장에서는 물러나 주는 것이 센스 있고 매너 있는 것으로 통하는 세상이 도래한지는 벌써 꽤 됐다. 많은 이들이 인생 후반전이라는 말들을 하고 있지만 어쩌면, 정말 냉철하게 말하자면, 인생 후반전은 필수요, 이제는 인생 연장전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는 시기가 왔다. 

    정체성도 나침반도 이정표도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사오십년을 또 살아갈 것인가. 우리가 이 시대에 행복하게 생존하지 못했는데, 어찌 우리 뒤에 오는 세대에게 자신 있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계속 경험을 정리하면서 글로 남기고 나만의 스토리를 또 만들어 가려고 애쓴다. 내 아들은, 나의 손자는, 내 며느리는 세월이 흐른 뒤 언젠가는 이 '상심의 바다(Sea of heartbreak)'같은 세상 속에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 무렵이 됐을 때, 나도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의 버팀목이 돼 주고 싶었던 한 남자의 스토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구순(九旬)을 바라보시는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언변이 나쁘지 않으시지만 요즘은 중요한 말씀을 하고 싶으실 때면 조용히 새벽에 일어나셔서 한 통의 편지를 자식들에게 쓰신 후 전해주신다. 당사자들은 아니라고 느끼고 그리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사람이라는 존재가 나이가 들면 본의 아니게 말이 길어진다는 것, 그런데 글을 통해 스토리로 정리하는 과정에서는 생각이 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고 글 쓰는 당사자도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고, 치유된다는 것, 그리고 장황하게 떠들면 잔소리가 돼 사라질 수도 있지만 글로 잘 적으면 매뉴얼이 되고 바이블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오랜 인생 속에서 깨우치셨고 그것을 실천하시는 걸까. 오늘 밤은 겸손히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를 하고 싶다. 그 지혜로운 아버지가 조금만 더 오래 건강하게 내 곁에 계실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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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준기

     IGM 세계경영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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