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운 택배 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 공동대표가 지난달 21일 서울 서대문구 전국택배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열린 '쿠팡 택배 노동자 추모 및 퀵플렉스 노동자 실태조사 결과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쿠팡, 런던베이글뮤지엄 등 소위 '잘 나가는' 기업들에 과로사 문제가 계속해서 따라붙고 있다. 과로사 없는 기업의 성장은 불가능한 것일까. 전문가들은 기업의 성장을 유지하며 과로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일자리 나누기와 근로복지기금 법인에 대한 세제 혜택을 제시했다.

이미 위험성 확인된 '장시간ㆍ심야 노동'

올해 과로사로 우리나라를 달군 두 기업이 있다. 쿠팡과 런던베이글뮤지엄이다. 두 기업은 매출 측면에선 '최고'를 경신하고 있지만, 과로사라는 그림자는 점점 길어진다.

쿠팡은 올해 3분기 매출액 12조8455억 원을 기록하며 분기 기준 역대 최대 매출액을 달성했다. 영업이익도 2245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1.5% 증가했다. 런던베이글뮤지엄도 지난해 매출액 796억 원을 달성하며 전년보다 120.9% 늘어났다. 영업이익도 91.7% 증가한 242억 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두 기업은 과로사 문제로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했던 고 장덕준 씨의 죽음이 산재로 인정받았고, 쿠팡의 배송전문 자회사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에서 택배기사로 일하다 사망한 고 정슬기 씨도 산재를 인정받았다.
 
런던베이글뮤지엄도 지난 7월 근로자가 1주 80시간 근무하다 과로사했다는 의혹이 언론에 보도되며 뭇매를 맞았다. 현재 런던베미글뮤지엄은 과로사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의학계에서는 장시간ㆍ심야 노동이 과로사를 유발한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는 추세다. 2011년 고용노동부가 발주한 '연장ㆍ야간ㆍ휴일 근로 등 과중 업무 종사자 관리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장시간 노동은 산재 위험을 크게 높이는 것으로 보고됐다. 하루 11시간 이상 심근경색 위험이 높아지고, 주 52시간~60시간 업무를 할 경우 관상동맥 질환 발생 위험이 1.5배 이상 증가한다.

이 연구를 수행한 김현주 이화여대 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노동법률 기고를 통해 "지난 10년간 장시간 노동이 심혈관계 질환뿐 아니라 우울증, 고혈압, 당뇨 등 만성 질환을 유발한다는 논문이 국제 학술지에 다수 보고됐다"며 "장시간 노동이 과로사, 정신질환을 유발한다는 것은 이제 다툼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실한 정설이 됐다"고 설명했다.

심야 노동도 마찬가지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2012년 심야 노동을 '2급 발암물질'로 분류했다.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는 지난달 29일 "심야 노동에 대한 의학적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며 "새벽 0시에서 5시까지 이루어지는 초심야시간에 이루어지는 새벽 배송은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기업이 크는데 근로시간 어떻게 줄이나"…사회적 대화 난항

장시간ㆍ심야 노동의 위험성이 확인됐음에도 근로시간 단축과 심야 노동 폐지를 반대 목소리도 있다. 기업의 성장이 줄어들고 근로자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에서다.

쿠팡은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택배산업 2차 사회적 대화'에 참석해 야간 수수료 할증과 야간 근무자 맞춤형 검진제도 도입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초심야배송 제한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쿠팡파트너스연합회(CPA)가 새벽 배송 기사 2405명을 대상으로 한 긴급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95%가 '심야 배송 지속' 의사를 나타냈다. 심야 배송 지속 의사를 보인 배송 기사의 43%는 '야간 시간이 교통 혼잡이 적고 엘리베이터 사용도 편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국민의힘은 새벽 배송 폐지 주장은 배송 기사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박성훈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지난 5일 "이미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인프라를 하루아침에 없애겠다는 것은 국민 편의를 외면하는 행태이며, 새벽 배송으로 돈을 벌고 있는 택배기사들의 삶을 무너뜨리고 일하려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으려는 막무가내 조치"라며 "일할 의지가 있는 노동자의 기회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강제로 박탈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도 뚜렷한 대안 없이 장시간 노동과 심야 노동을 규제하는 건 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구정모 목원대 경영학부 교수는 "무작정 근로시간을 줄이고 심야 노동을 금지하면 우리나라 이커머스 산업에 타격이 올 수밖에 없다"며 "산업 성장에 대한 대안 없이 노동계의 입장만 받아들여 정책을 추진하면 이커머스 산업의 미래가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기간에 법 개정 등으로 과로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등 사회적 대화 기구를 통해 노사정이 충분히 대화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해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혁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도 "산업의 구조적 변화에 변화와 이에 대응하는 일의 방식 변화를 따를 필요가 있다"면서도 "다만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합리적인 대응조치를 제도화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장'도 함께할 대안은?…'일자리 나누기ㆍ기금 세제 혜택'

산업의 성장 동력을 유지하면서 과로사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일자리 나누기와 근로복지기금 법인에 대한 세제 혜택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정봉수 강남 노무법인 대표공인노무사는 "이케아 등 외국계 기업은 육체노동을 하는 직군에 대해 1주 근로시간을 20시간으로 줄이고 채용을 늘리는 일자리 나누기 방식으로 과로사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며 "육체노동은 1주 근로시간이 20시간 이상이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 일자리 나누기 정책"이라고 소개했다.

일자리 나누기의 경우 주휴수당 중복 지급 등으로 기업의 비용 부담이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정 노무사는 장기적으로 보면 기업의 비용 부담이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 노무사는 "초반에는 비용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이미지 개선, 산재 보상금 미지출 등으로 오히려 비용이 절감될 것"이라며 "초반에 인사노무시스템만 잘 갖춰놓으면 과로사 문제에서 자유로우면서 비용 절감도 가져올 수 있는 방안"이라고 했다.

다만 일자리 나누기는 임금 저하에 따른 근로자 저항이 있을 수 있어 도입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정 노무사는 "일자리 나누기를 하면 임금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저임금으로 근로자 채용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도입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근로복지기금 법인에 대한 세제 혜택을 강화해 근로자 복지를 강화하는 방법도 대안 중 하나로 꼽힌다. 구 교수는 "근로복지기금 법인 설립 요건을 완화하고 세제 혜택을 확대하면 근로자 복지가 증진될 것"이라며 "이를 통해 근로자들에 대한 건강 검진을 강화하면 과로사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근로자들의 권리 의식을 강화하는 교육도 실시할 필요가 있다. 권 교수는 "청년들이 미선호하거나 진입장벽이 낮은 서비스업, 요식업 등에서 과로사 문제가 주로 발생하고 있다"며 "이러한 직군은 정당한 권리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낮은 점이 과로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청년 노동교육을 강화하고 모든 산업에서 근로시간 등 노동환경을 재점검하는 노력이 있어야 과로사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했다.

이재헌 기자 jh59@elabo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