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기업들이 밀집돼 있는 전라남도 여수시 여수산업단지(사진=뉴시스)
 
석유화학산업이 내년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지원 방향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계는 정부가 업황 반등기를 고려해서라도 고용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지원 정책을 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노동조합법 2ㆍ3조 개정(노란봉투법)으로 인력 구조조정이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에선 고용 경직성 해결이 우선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위기의 석화산업…'해고 불안'에 떠는 노동자들
 
석유화학산업은 정제된 석유 원료를 열분해해 석유화학 기초 연료, 합성수지, 합성 섬유를 제조하는 산업이다. 대규모 시설 투자를 요구하는 산업으로 시장 수요 변동에 대한 대응 능력이 취약해 경기 변동에 민감하다.
 
지난 8월 여천NCC가 석유화학 업황 악화로 3년 누적 적자 8200억 원을 기록해 채무불이행 위험에 빠지면서 석유화학업계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간 산업이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지만 위기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여천NCC는 대주주인 DL이 2000억 원을 투입하면서 위기를 넘겼지만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결국 지난 8월 산업통상자원부와 10개 석유화학기업(대한유화, DL케미칼, 롯데케미칼, S-Oil, SK지오센트릭, LG화학, HD현대케미칼, GS칼텍스, 한화솔루션, 한화토탈)은 '석유화학산업 재도약을 위한 산업계 재편 자율 협약식'을 맺고 연말까지 기업별 산업 재편 계획 마련에 합의했다.
 
정부는 '선 자구노력 후 지원' 원칙에 따라 연말까지 기업별 사업 재편 계획을 검토한 뒤 관련 정책을 발표해 3년 안에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을 완료할 방침이다.
 
석유화학산업은 거대 장치 산업이라는 산업 특성으로 기업 간 인수합병 후 인력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산업 재편이 이루어져 왔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이루어진 석유화학산업 재편도 기업 간 인수합병 후 인력 구조조정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번에도 여수의 GS칼텍스와 LG화학, 울산의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의 인수합병 논의가 있는 상황이다. 인수합병 후 인력 구조조정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점쳐져 근로자들의 불안이 높다.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식품노조)이 지난해 여수 지역 조합원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합원의 37%가 고용 불안에 대해 '매우 걱정한다'고 답했다. 특히 하청 근로자들의 경우 44.4%가 매우 걱정한다고 응답했다.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의 여파는 석유화학기업 근로자들에게만 미치지 않는다. 산업 특성상 석유화학 산업단지 건설플랜트, 운송 근로자들까지도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에 영향을 받는다.

김학진 화섬식품노조 정책실장은 "석유화학기업들이 설비 투자와 생산량을 줄이면서 이미 건설플랜트, 운송 노동자들이 입은 피해는 심각하다"며 "일감이 60%나 감소하다 보니 고통이 큰 상황"이라고 말했다.
 
'노란봉투법'으로 구조조정 더 어려워져
 
이번 석유화학 구조조정과 관련해 경영상 위기가 있어야만 해고가 가능한 우리나라 노사관계 특성, 내년 3월 10일 시행되는 노란봉투법의 영향 등으로 인력 구조조정이 어려워 산업 재편에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승길 일자리연대 정책위원장은 "그동안 보수 정권들에서 고용 경직성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결국 해결되지 못 했다"며 "산업 재편에 대규모 인력 조정이 필요하다면 개편하지 못한 고용 경직성 문제가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인력 구조조정은 사회적으로도 큰 부담과 문제를 가져온다"며 "석유화학산업 재편을 위해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까지 필요한지에 대해 노사가 빠르게 결론을 내려서 충격이 최소화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노란봉투법으로 쟁의행위 범위가 넓어져 인력 구조조정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정책위원장은 "노란봉투법이 통과됨에 따라 정리해고도 쟁의행위의 이유가 될 수 있다"며 "정리해고를 이유로 한 파업이 적법한 쟁의행위로 인정되면 인력 구조조정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노란봉투법 시행 초기에만 분쟁이 격화된 뒤 안정을 찾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준희 광운대 법학부 교수는 "노란봉투법 시행 초기에는 석유화학산업 같은 일부 산업이나 사업장에서 분쟁이 격화될 수 있겠지만 결국 산업의 전체적인 위기 대응 능력이 향상될 것"이라며 "노란봉투법 자체가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전통 직렬 근로자들의 직종 전환에 대한 두려움과 노조의 비타협적 태도가 일부 어려움이 될 수는 있지만 결국 노사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풀어나갈 일"이라며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닌 노사가 대화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계 "고용안정 전제로 기업 지원해야"
 
노동계는 정부가 기업 지원에 앞서 고용 유지부터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실장은 "이번 석유화학산업의 위기는 자본의 단기 이익 추구가 가장 큰 문제였다"며 "2010년대부터 예견된 위기가 터진 것인데 책임을 노동자들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석유화학기업들은 이번 산업 재편을 이유로 정부에 각종 세제 혜택, 전기료 지원 등 기존 민원 처리를 요구하고 있다"며 "정부가 기업에 지원을 하더라도 고용 유지를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정리해고 이후의 지원 대책은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김 실장은 "일단 정리해고가 이루어진 이후에 실업급여, 재취업을 지원하는 방식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일자리를 잃어서 생계가 막막한데 새로운 직종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까지의 어려움이 너무 크다. 고용 유지와 실질적인 일자리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근로자 지원 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폭넓은 실태조사의 필요성도 강조됐다. 김 실장은 "석유화학산업의 특성상 석유화학기업 노동자들뿐 아니라 건설플랜트, 운송 노동자들에 대한 실태조사까지 모두 이루어져야 제대로 된 지원책을 마련할 수 있다"며 "그럼에도 정부는 석유화학단지 건설플랜트 노동자, 운송 노동자에 대한 실태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실태조사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대책을 세우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건설플랜트, 운송의 경우 이들에 대한 지원책이 함께 마련되지 않으면 이들이 석유화학산업단지를 떠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조선업처럼 이후에 업황이 회복되더라도 일손 부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과거 조선업은 불황시기에 강도 높은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이후 업황이 회복됐지만 숙련 인력이 대부분 조선소를 떠나 인력난을 겪고 있다.
 
김 실장은 "지금처럼 일감이 없으면 건설플랜트, 운송 노동자들은 석유화학산업단지에 정주하면 노동력을 제공할 필요가 없어진다"며 "이들에 대한 지원책이 없으면 금방 산업단지를 떠날 것이고 업황이 회복되더라도 일손 부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래를 생각한다면 건설플랜트, 운송 노동자까지 포괄하는 지원책이 나와야 한다"며 "인력 구조조정이 아닌 고용 유지를 우선으로 한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재헌 기자 jh59@elabo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