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인천국제공항 제2합동청사 시설 공사 근로자들이 폭염에 일을 하며 물을 마시고 있다. (사진=뉴시스)
 
본격적인 폭염기가 시작된 가운데 규정이 모호한 산업안전보건법과 권고에 불과한 고용노동부 가이드라인이 폭염 노동 사각지대를 만들고 있다. 폭염에 취약한 건설ㆍ물류 노동자들은 보다 명확한 폭염 대책 입법을 촉구하고 있다.
 
고용부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여름철(6월~8월) 평균 기온은 24.2도로 평년(1991년~2020년) 대비 0.5도 상승했다.
 
폭염일수도 2000년대 평균 9.1일이었던 것이 2010년대 이후에는 14.5일로 늘어났다. 지난 6년간 180명(사망자 24명)이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산재를 당했고, 이 중 91.1%(164명)이 7월과 8월에 집중됐다.
 
'모호한' 산안법ㆍ'강제성 無' 가이드라인, 폭염 사각지대 만들어
 
2022년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으로 폭염에 노출되는 장소에서 작업하는 근로자에 대해 사업주가 적절한 휴식 등 필요조치를 할 의무가 법제화됐다.
 
사업주가 폭염기에 적절한 온열 산재 예방조치를 하지 않으면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형사처벌될 수 있고, 유죄판결이나 약식명령을 받으면 200시간 이내의 산재 예방 프로그램 수강 이수 명령도 내려질 수 있다. 고용부 장관의 영업정지 명령도 가능하다.
 
다만 '적절한 예방조치'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법제화가 돼 있지 않다. 고용부가 적절한 예방조치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배포하고 있을 뿐이다.
 
고용부는 폭염 단계별 대응 가이드라인을 통해 33도 이상에서 매시간 10분 휴식, 35도 이상에서 매시간 15분 휴식과 무더위 시간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옥외 작업 중지, 38도 이상에서 매시간 15분씩 휴식과 무더위 시간대 재난ㆍ안전관리 제외 옥외 작업 중지를 권고하고 있다.
 
다만 고용부 가이드라인은 권고 사항에 불과해 가이드라인 위반만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처벌이 없다보니 현장에서 가이드라인을 위반하는 사례도 많다. 지난해 전국건설노동조합(건설노조)이 조합원 320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81.7%가 '체감온도가 35도 이상이어도 오후 2~5시에 옥외 작업을 중단할 수 없다'고 답했다.
 
전재희 건설노조 노동안전보건실장은 "현재 고용부 가이드라인이 있지만 권고에 불과한 상황"이라며 "가이드라인을 어긴다고 해서 처벌받지 않으니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적절한 예방조치에 대한 노사의 생각이 달라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것도 쉽지 않다. 지난해 코스트코 하남점에서 일하던 김동호 씨는 폭염 속에 업무를 하다 사망했다. 김 씨의 사망과 산재 승인이 후 1년이 지났지만 마트산업계의 폭염 대책에 대한 단체협약 체결은 없는 상황이다.
 
허영호 마트산업노동조합(마트노조) 사무처장은 "김동호 씨 사건 이후에도 마트산업 현장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며 "회사가 새로운 지침을 몇 개 발표하기는 했지만 현장 노동자들이 보기에는 현실성이 없는 대책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폭염기 적절한 휴식 보장 등 온열 산재 방지 대책이 단체협약에 포함된 곳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업도 대책 내놨지만 '대기업 위주ㆍ실효성' 문제
 
고용부가 폭염 대책에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 다만, 고용부는 폭염 대책도 원하청 상생 협약에 따른 '자율적 마련'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5월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이마트를 방문해 원하청 상생 협약에 따른 온열질환 예방 노력을 당부했다.
 
이 장관 방문 이후 이마트는 폭염 대책을 발표했다. 이마트 안전보건관리책임자가 발표한 폭염 대책은 작업장별 체감온도 측정ㆍ기록, 이동식 에어컨 등 냉방기기 설치, 온열질환 응급키트 추가 비치 등이다.
 
다만 실효성과 우선순위에 의문부호가 붙는다. 하 사무처장은 "원하청 상생 협약을 통해 고용부가 폭염 대책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만, 이후에 발표한 대책으로 현장이 크게 바뀐 점은 없다"며 "가장 시급한 휴게실이 여전히 마련돼 있지 않고, 폭염에 취약한 물류 적재소에 냉방기 설치도 미흡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6년간 근로복지공단 통계상 온열 산재가 가장 많았던(전체 온열 산재의 48%) 건설업계도 폭염 준비로 분주하다.
 
현대건설은 6~9월을 온열질환 예방 혹서기 특별관리기간으로 정해 '3GO!프로그램'을 실시한다. 3GO!프로그램은 온열질환 3대 작업관리 수칙(물ㆍ그늘ㆍ휴식 제공)을 중심으로 혹서기를 대응하는 제도다.
 
디엘이앤씨도 '건강한 여름나기 123 캠페인' 실시에 나선다. 123 캠페인은 오후 1시에 고령자ㆍ고혈압 등 고열 취약자 건강 상태 확인, 오후 2시에 30분간 쿨링타임 부여, 오후 3시에 시원한 음료, 화채, 빙과류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SK에코플랜트는 폭염 시 단계별 탄력근로제를 실시하고, 옥외 근로자에게 기능성 보호구(아이스 조끼, 안전모 아이스팩)을 제공한다.
 
다만 폭염 대책을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이 없는 중소 건설사의 경우 여전히 근로자들이 폭염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전 실장은 "준비 여력이 있는 대형 건설사들은 휴게시설 설치 등 형식적일 수 있는 조치라도 다 갖춰놓는 편"이라며 "그러나 중소 건설사들은 휴게시설을 갖출 여력도 부족하고 대부분 하도급이어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휴게시설을 원청에게 요구해야 할지 하청에게 요구해야 할지 몰라 요구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 근로복지공단 통계에 따르면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온열 산재가 많이 발생했다. 지난 6년간 온열 산재의 76%(112건)가 상시 30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으며, 온열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는 상시 100인 미만 사업장에서 91%(20건)가 발생했다.
 
'폭염 대책 입법' 촉구한 건설ㆍ물류 노동자들
 
지난 21대 국회에서 이소영ㆍ이해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폭염피해예방 3법(자연재해대책법ㆍ재난안전관리기본법ㆍ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에 폭염에 가장 취약한 건설ㆍ물류 노동자들은 22대 국회에 입법을 통한 온열 산재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건설노조는 지난달 19일 '건설현장 폭염지침 법제화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서 건설노조는 건설 현장 노동자의 정기 휴식을 의무화하고 휴식으로 인한 작업시간 단축 시 임금을 보전하는 내용이 담긴 폭염법 제정을 촉구했다.
 
전 실장은 "현재 강제성이 없는 가이드라인과 구체성이 없는 산업안전보건법만으로는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폭염에서 보호받을 수 없다"며 "폭염법을 제정해 정기 휴식과 작업시간 단축으로 인한 임금 보존 방법을 의무화해야 건설현장 폭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공공운수노조) 물류센터지부도 2일 '물류노동자 폭염투쟁 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물류센터 냉난방 설치의무화를 위한 건축법ㆍ기계설비법 개정, 폭염기 물류센터 노동자에 대한 유급 휴게시간ㆍ휴게소 설치 의무 법제화를 요구했다.
 
민병조 공공운수노조 물류센터지부 지부장은 "물류센터는 고용부 가이드라인을 한 번도 제대로 지킨 적이 없다"며 "형식적인 가이드라인으로는 폭염기 물류노동자들이 보호받을 수 없어 물류센터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법제화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재헌 기자 jh59@elabo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