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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 2017-02-01 09:58:51

    수정 : 2017-02-01 11:05:42

그때 그시절, 96년 노동법 파동의 전모

2017-02-01 09:58:51



그때 그시절, 96년 노동법 파동의 전모
[2017년 2월호 vol.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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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년 크리스마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 중 두 명을 제외한 154명이 서울 시내 호텔에 나눠서 투숙했다. 다음날인 26일 새벽 5시, 이들은 차창이 가려진 버스를 타고 국회 본회의장 앞에 조용히 집결했다. 호텔 합숙까지 하며 완벽한 보안을 유지한 당 지도부의 작전으로 국회 잠입(?)에 성공한 이들은 당연히 야당의 방해 없이 노동법과 안기부법 등 관련 11개 법안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국회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노동법 날치기 파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날이 밝고 전모가 드러나자, 당연히 노동계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야당도 '쿠데타'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며 여당을 성토했다. 여당이 24일까지도 노동법 개정안과 관련한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에, 마음 놓고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야당과 노동계는 선물 대신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노동계가 본격 투쟁에 들어가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6일 오전부터 민주노총은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총파업을 시작했다. 민주노총 파업 방침에 소극적이던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은 물론 서울지하철 노조, 대형병원 노조, 방송4사 노조 등 전국이 들고 일어났다. 여당의 텃밭인 대구에서조차 시민 80%가 "단독 처리가 잘못됐다"고 응답한 여론조사가 공개됐다. 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주가는 폭락했다. 워싱턴 타임즈는 27일, "노동법 파업이 한국경제를 마비시켰다"고 보도했다.
    대통령과 여당의 노림수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여당 관계자는 "야당이 노동법 개정 논의 자체를 거부하며 환경노동위원회서부터 봉쇄해 해를 넘길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였다"며 "이어지는 봄에 노동계 춘투까지 겹쳐 국정 운영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전한 월간 <사회평론 길>의 홍승기 차장은 "여당은 경기침체로 어수선한 경영계 편을 들어주는 법개정을 강행해 보수표를 확실히 견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이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하는 듯했다. 야당은 공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했고 재계는 환영일색이었으며 어차피 신한국당 편이 아닌 민주노총은 차치하고라도 한국노총도 나중에 풀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1996년 4월에는 경상수지 적자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그 위기감이 정부의 노동법 개정 방향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도 있다. 김영문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문민정부는 변화된 경제-국제환경에 대처하려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무엇보다 WTO체제가 열려 무한경쟁에 돌입했고, OECD 가입으로 국제 수준에 맞춰야 했다"며 "게다가 IMF 위기의 전조 증상이 나타나 경제지표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해 그 원인인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고쳐야 겠다는 의도가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 '민주주의 수호' 의미로 확장된 총파업

    김 대통령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1월 7일 열린 연두회의에서 "새 노동법은 지난 달 가입한 OECD 회원국 수준"이라며 "43년 동안 개정되지 않은 (노동법이란) 옷을 계속 입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9일에는 총파업을 불법이라고 칭하며 "법에 따라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고 밝히는 등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이홍구 여당 대표도 같은 날 "노동관계법은 재개정 협상 대상이 아니다"라며 "지연전술만 쓰던 야당이 노동관계법 재개정을 논하는 것은 기만적"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재계도 파업 철회를 적극 설득하면서도, 간부를 고발하거나 파업기간 동안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히는 등 강온 양면 작전을 펼치며 노조를 압박했다. 정부도 민주노총 지도부 20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받아 검거에 나섰다.
    하지만 연초부터 어수선한 정국을 맞은 국민이 느끼는 거부감도 강했다. 다소 소강 국면을 보이던 파업은 후속 파업과 시위, 시국 선언으로 그 불씨가 꺼지지 않고 이어졌다. 파업이 단위노조의 자발적 투쟁으로 이뤄졌던 점도 컸다. 
    박성인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은 <한국사회 '사회적 합의'의 역사와 교훈>이라는 글에서 "97년 1월 말까지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총파업참가 규모는 3,206개 노조에서 연인원 359만명에 달했다"며 "정리해고를 제도화한다는 점이 근로자들을 단결시키기도 했지만, 87년 대투쟁 경험과 민주노총이라는 구심점의 존재, 대공장 노조라는 주력부대가 이런 정치총파업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노동계에 몸담았던 한 변호사도 "군부 독재 시대 유물인 날치기가 다시 등장했으니 국민이 강력하게 반발했던 듯하다"고 전했다. 이수진 고려대 사회학 박사도 <96-97년 노동자 총파업에 대한 사회운동론적 분석>에서 "노동법개악 저지라는 총파업의 목표가 민주주의 수호와 연결됐고, 이것이 총파업이 오래 이어지는 데에 영향을 줬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의 입지에도 변화가 생겼다. 민주노총이 노동계와 생산현장에 가지는 막강한 영향력이 확인돼 "더 이상 법외단체로 묶어둘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고, 결국 민주노총은 99년 말부터 합법 노조의 길을 걷게 된다.
    이렇게 역풍을 맞은 김 대통령은 결국 97년 1월 21일,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 김종필 자민련 총재, 여당 이홍구 대표와 영수회담을 열고 협조를 요청했다. 사실상 노동법을 다시 논의할 수 있다고 백기투항한 것이다. 이에 야당 측은 "국회에서 다시 논의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이미 통과된 날치기법은 무효"라고 주장한 반면, 김 대통령은 "이미 통과된 법을 무효화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되므로 불가능하다"며 국회에서 다시 논의하자는 의견을 밝혔다.
    결국 2월 17일 임시국회가 소집돼 노사정이 참가한 공청회가 열렸고, 여야는 2월 27일부터 노동관계법 단일안 마련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3월 7일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야당만의 합의안을 일단 국회에 제출했다. 그리고 여야는 야당이 국회에 제출한 합의안을 기초로 3월 10일에 최종안을 마련했다.
    결국 97년 3월 13일, 법안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포돼 10개월을 끌어온 노동관계법 개정안은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됐다. 날치기법의 생명은 불과 며칠에 지나지 않았다.
    이 '97년법'의 특징은 내용만 보면 개정 수준이지만 형식은 제정이라는 점이다. 여야가 변칙통과 된 96년법의 효력을 제대로 결론내지 못한 탓이다. 만일 96년법을 무효로 본다면 97년법은 그 전에 있던 관계법을 개정하는 것이 되지만, 여당이 96년법을 무효로 보는 것을 거부한 탓에 어쩔 수 없이 96년법을 아예 폐기하고 새로이 법을 제정하게 된 형식을 취했다.



    ● 현행 노동법의 바탕이 된 97년 노동법

    노동관계법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 새로이 제정됐고, 더불어 노동위원회법,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뀐 법을 두고서는 경영계와 노동계 모두 불만을 표시했다. 경영계는 무노동-무임금과 관련해서도 단순히 지급의무가 없다고 선언적으로만 표현하거나, 대체근로부분에 대해 신규 하도급을 금지한 점, 복수노조가 도입된 점은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경영계 관계자는 "차라리 날치기를 하지 않았다면 정리해고제나 복수노조에서 필요한 것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며, 당시 정부 여당의 꼼수가 오히려 96년까지 이뤄졌던 노동법 개정 논의의 원래 취지마저 퇴색시켰다고 전했다. 반면 노동계는 재개정안이 날치기안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김영문 교수는 "1997년 재개정 노동법을 정치사적으로 보면, 입법자의 독단을 총파업과 국민적 저항으로 막고, 다시 논의와 합의를 통한 재개정을 하도록 했다는 의미가 있다"면서도 "하지만 정치사적-역사적-법적 중요성에 비해 재개정 노동조합법은 문제가 된 '날치기 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국민의 저항에 터잡아 거대한 담론을 일으킨 입법재개정임에도 불구하고, 법률 내용은 사실 문제를 일으킨 '날치기법'을 그대로 통과시킨 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은 단순히 시작에 불과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97년 말에는 IMF구제금융사태를 맞이했고, 그 과정에서 노사정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다시 노동법 개정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97년법'은 큰 수정 없이 20년간 우리 노동관계법의 근간이 됐지만, 이후에도 이미 두 전문가가 언급했듯 많은 쟁점을 만들어내고 비판 받는 법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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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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