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금속노동조합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가 2019년 8월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사히글라스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뉴시스)

제조업 최초로 사업주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아사히글라스 불법파견 형사사건 1심이 뒤집혔다. 2심은 불법파견이 아니라면서 원하청 업체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네 번의 민형사 판결에서 모두 불법파견이 인정된 것과는 다른 판결이다.
 
재판부는 대법원이 제시한 다섯 가지 파견 판단 요소 중 상당한 지휘ㆍ명령과 원청 사업 편입 여부에 중점을 두고 판단했다. 이 두 가지가 파견을 판단하는 핵심 요소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요소라고 명시적으로 구분했다.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판단한 그간 대법원 판결과는 다른 부분이다. 특히 혼재근무가 이뤄졌더라도 파견이 아니라고 본 케이티앤지(KT&G) 대법원 판결을 인용했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구지방법원 제4형사부(재판장 이영화)는 파견법 위반으로 기소된 정재윤 전 지티에스 대표 등의 항소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하청인 지티에스 근로자들이 AGC화인테크노한국(AFK)의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돼 상당한 지휘ㆍ명령을 받으며 파견법에서 정한 근로자 파견 관계를 형성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1심에서는 하라노타케시 전 AFK 대표에게 징역 6개월에 2년 집행유예, 정재윤 대표에게 징역 4개월에 2년 집행유예, 법인에는 각각 벌금형이 선고됐다. 하라노타케시 전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은 항소했고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노조 설립 한 달 만에 해고ㆍ폐업한 하청...1심 "불법파견 인정"
 
AFK는 엘시디(LCD)용 글라스 기판을 제조하는 업체다. 제조공정은 원료를 녹이는 HOT 공정, 냉각하는 COLD 공정, 유리를 세정하고 절단하는 GUT 공정, 유리를 연마하는 기판가공 공정으로 나뉜다.
 
이중 GUT 공정은 오티에스에 도급을 맡기고 있다. 오티에스는 도급 업무를 위해 지티에스를 설립했다. 이 공정에서 근무하는 사내협력업체 근로자들은 지티에스 소속이다. 이후 AFK는 COLD 업무도 지티에스에 맡겼고 근로자들은 두 공정에 나눠 투입됐다.
 
AFK는 2015년 지티에스와의 계약을 해지했고 지티에스는 곧바로 근로자 178명을 해고하고 폐업했다. 해고는 지티에스 노동조합이 설립된 지 한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해고된 근로자들은 AFK와 지티에스 간 도급이 사실상 불법파견이었다면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냈고 1심과 2심에서 승소했다. 형사 소송도 진행됐다. 당초 대구지검 김천지청은 불기소로 처분했지만 근로자 측이 항고하고 대검찰청 검찰수사심의위원회가 기소의견을 내면서 원하청 사업주는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을 판결한 대구지법 김천지원 김선영 판사는 불법 파견을 인정했다. COLD 공정은 지티에스와 AFK 근로자가 섞여 근무했다. AFK가 수행한 HOT 공정과도 컨베이어 벨트로 연결돼 있었다. GUT 공정은 구분돼 있었지만 COLD 공정을 거친 제품 중 40% 정도가 이 공정을 거쳤고 선행 공정의 작업량에 영향을 받았다. 지티에스의 근로자가 AFK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돼 있었던 것이다.
 
김 판사는 지티에스 근로자의 근로시간이 AFK의 생산계획과 공장 가동사정, 작업지시 등에 좌우된 점, 지티에스 근로자들이 AFK 관리자 지시를 받아 일한 점, 지티에스 근로자가 AFK 직원의 일을 수행한 점 등도 모두 불법파견의 징표로 인정했다.
 
특히 김 판사는 "간접고용은 노동자에게 불이익이 큰 고용형태이고 파견법은 직접제조생산공정에서 파견을 금지하고 있다"며 "파견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에 불법파견을 한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보고 징역형을 선고했다.
 
"지휘ㆍ명령, 혼재 작업 없었다"...뒤집힌 2심
 
그러나 2심의 결론은 달랐다. 불법파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AFK가 지티에스 근로자에 대해 상당한 지휘ㆍ명령을 했거나 지티에스 근로자가 AFK에 사업에 편입돼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FK가 지티에스 근로자에게 상당한 지휘ㆍ명령을 했는지와 지티에스 근로자가 AFK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돼 있었는지를 중심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AFK가 실질적으로 지티에스 근로자에 대해 상당한 지휘ㆍ명령을 했는지 여부는 근로자 파견을 인정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에 해당한다"며 "그러나 민법상 도급계약에서 도급인은 수급인이나 그 근로자에 대해 업무 이행에 대한 지시가 가능하고 작업 결과에 대한 검수권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AFK가 생산해야 하는 품종, 매수 등을 구체적으로 기재한 생산지시서를 지티에스에 교부한 것은 파견의 징표로 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납품해야 하는 제품의 사양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생산 지시가 구체적일 수밖에 없어서다.
 
재판부는 하청 근로자 관리는 지티에스 현장관리자를 통해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이 현장관리자들은 사무실에 상주하면서 AFK로부터 생산지시서류를 받고 업무협의를 해서 지티에스 근로자에게 전달했다.
 
GUT 공정의 경우 하청근로자들이 전체 생산 작업을 독자적으로 수행했다고 봤다. AFK 근로자는 별도 사무실에서 설비 관리와 정비 업무를 담당해 혼재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원하청 협업이 필요한 업무도 있었지만 사전에 양측 관리자가 담당 업무를 협의해 각각 업무를 진행했다고 판단했다.
 
COLD 공정의 경우 혼재가 발생하긴 하지만 원하청 근로자의 작업 내용과 장소가 구분된다고 봤다. AFK 근로자는 설비 앞쪽에서, 지티에스 근로자는 설비 뒤쪽과 창고에서 작업했다는 이유다.
 
"혼재작업해도 파견 아냐" KT&G 판결 인용...파견 판단 요소에도 차등
 
대법원은 파견 판단 요소로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제삼자가 근로자에 대해 상당한 지휘ㆍ명령을 하는지 ▲근로자가 제삼자 소속 근로자와 하나의 작업집단으로 구성돼 제삼자의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됐는지 ▲원고용주가 작업에 투입될 근로자의 선발이나 근로자의 수, 교육, 작업ㆍ휴게시간, 휴가, 근무태도 점검 등에 관한 결정 권한을 독자적으로 행사하는지 ▲근로자가 맡은 업무가 제삼자 소속 근로자의 업무와 구별되고 업무에 전문성ㆍ기술성이 있는지 ▲원고용주가 필요한 독립적 기업조직이나 설비를 갖추고 있는지다.
 
사내하청관계에서 제삼자는 원청, 원고용주는 하청 사업주를 말한다. 법원은 이 기준에 따라 형식상 도급계약이 사실상 파견계약에 해당하는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한다. 1심과 2심 모두 이 기준을 인용했다.
 
그러나 2심은 판단 요소 간에 차등을 뒀다. 다섯 가지 요소 중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핵심적인 징표고 나머지는 부차적ㆍ보완적인 고려요소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와 파견법 규정을 고려하면 첫 번째 요소는 근로자파견을 인정하는 필수적인 요소고 두 번째 요소는 첫 번째 요소와 관련한 사정을 평가할 때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파견관계의 핵심적인 징표"라고 설명했다.
 
파견법은 근로자 파견을 "파견사업주(하청)가 근로자를 고용한 후 그 고용관계를 유지하면서 근로자 파견 계약의 내용에 따라 사용사업주(원청)의 지휘ㆍ명령을 받아 사용사업주를 위한 근로에 종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어 "나머지 요소는 도급관계에 관한 적극적 징표이자 근로자 파견 관계에 관한 소극적 징표인 부차적ㆍ보완적인 고려요소가 된다"며 "따라서 나머지 요소를 갖췄다고 해서 곧바로 근로자 파견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고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소를 갖췄는지 정도를 비교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또 "나머지 요소를 갖추지 못하거나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소에서 근로자 파견에 부합하지 않는 사정들이 현저하게 나타난다면 근로자 파견 관계에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판례상으로는 다섯 가지 요소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원칙이다. 고용노동부가 대법원 판례를 바탕으로 2019년에 발표한 '근로자 파견의 판단 기준에 관한 지침'에서도 각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재판부와 같이 다섯 가지 요소의 무게를 다르게 봐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주로 사용자 측 주장이다.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이번 재판부의 해석이 대법원 판례의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며 "근로자 파견 사건의 본질적인 면은 개별적 근로계약관계를 간주한다는 것이니 도급과 파견을 구별할 때도 하청 근로자 개개인에 대한 지휘명령과 공동작업 여부를 따지는 것이 핵심이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네 번째나 다섯 번째 요소는 대법원 판결 문언상 '계약의 목적'이 중심"이라며 "목적이 확정돼 있고 목적에 필요한 전문성과 목적에 필요한 독립적 기업조직이나 설비를 갖추면 될 뿐 그 목적 자체가 고도화돼 있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어서 부차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세 번째 요소의 경우 핵심 요소로 봐야 하는지 부차적 요소로 봐야 하는지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 하청업체가 자체적으로 근로자들을 채용하고 해고하더라도 파견이 아니라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원청이 도급비를 통해 하청 근로자의 임금과 인원을 결정하는지는 판례마다 견해가 엇갈리는 부분이다.
 
특히 이번 재판부가 불법파견을 부정한 2017년 케이티앤지 판결을 인용한 것이 눈에 띈다. 이 판결은 원청과 사내하청 근로자들이 일부 혼재해 근무했더라도 불법파견이 아니라고 본 판결이다.
 
재판부는 "파견법이 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업무를 파견 허용 업종에서 제외했더라도 이는 파견법상 허용되는 근로자 파견과 사내도급과의 관계에 대해 침묵한 것일 뿐 곧바로 제조업 사내도급을 금지하는 취지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며 "사내도급의 경우에도 케이티앤지 판결에 따라 근로관계의 실질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탁선호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직접생산공정에 대한 파견 사건에 지원설비 운전 업무 사건인 케이티앤지 사건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사용자 측 변호인의 서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며 "직접생산공정에서의 업무매뉴얼, 작업지시서를 통한 업무지시, 현장대리인을 통한 간접적 작업지시를 모두 부정하겠다는 것으로 그동안의 대법원 판례와 명백히 배치되는 심각한 법리 오해와 사실 오인이 있는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번 판결은 그동안 직접생산공정에서 축적된 대법원의 판례에 명백히 반한다"며 "생산공정의 특성을 고려하고 객관적인 증거에 입각해 근로관계의 실질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형식적 계약과 객관적 증거에 반하는 정규직 관리자의 진술을 채택해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꼬집었다.
 
"불법파견 4번 인정받았는데"...근로자 측 반발
 
이번 판결은 AFK 불법파견이 문제 된 다른 법원 판결과도 방향이 다르다.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1심과 2심, 손해배상 청구 1심, 형사사건 1심 판결 모두 근로자 측의 연승이었다. 그러나 이번 재판부에서는 과거 판결에서 나왔던 파견 증거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죄 선고 직후 방청하던 근로자 측에서는 항의가 쏟아져 나왔다. 근로자들은 판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언성을 높여 소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차헌호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장은 "이미 네 곳 재판부에서 불법파견이라는 판결이 나온 상황에서 이번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다른 재판부는 오랫동안 여러 명의 증인 심문과 현장 검증 3번을 진행하는 등 치열하게 다퉈서 불법 행위라고 판정을 내렸는데 이번 항소심에서는 새로운 증거 제시 없이 증인 신문 한 명 한 것이 전부인데도 판결 결과가 뒤집혔다"고 부당함을 설명했다.

이번 판결과 관련해 지회는 20일부터 대구지법 앞에서 항의 집회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지예 기자 jyjy@elabo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