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와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가 지난 15일 서울법원종합청사 앞에서 HD현대건설기계의 불법파견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온 직후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지예 기자 jyjy@)
 
법원이 현대중공업에서 분사한 HD현대건설기계가 사내하청 근로자를 불법으로 파견 사용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HD현대건설기계는 굴착기 등 기계를 만드는 업체로 이미 고용노동부의 불법파견 시정명령을 받은 사업장이다.

고용부에 이어 법원도 HD현대건설기계가 하청업체 근로자의 작업 방식과 순서를 정하는 등 구체적인 업무 지시를 했다고 판단했다. 특히 HD현대건설기계가 하청업체 설립에 개입했다는 점을 인정해 하청업체가 독립적 기업 조직을 갖추지 못했다는 판단도 나왔다.

23일 노동법률 취재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제41민사부(재판장 정회일)는 HD현대건설기계 서진이엔지 근로자가 HD현대건설기계를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지난 15일 "HD현대건설기계가 사내하청업체 근로자에게 작업순서, 방법 등에 관해 구체적인 지시를 했다"며 "사내협력업체가 독자적인 사업주로서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증거도 없다"고 판단했다.

교섭 요구에 하청업체 폐업..."HD현대건설기계가 직접 고용해야"

서진이엔지는 현대중공업에서 분사한 HD현대건설기계 하청업체다. 서진이엔지 근로자들은 HD현대건설기계 공장 안에서 굴착기 부품 중 암(ARM)과 붐(BOOM)을 제작하는 일을 했다.
 
근로자들은 2019년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에 가입해 서진이엔지를 상대로 교섭을 요구했다. 서진이엔지와 교섭이 시작됐지만 3개월 만에 결렬됐다. 지회는 쟁의행위에 나섰고 HD현대건설기계는 서진이엔지에 배당하는 물량을 줄였다.

2020년 8월 서진이엔지는 근로자들에게 폐업을 통보했다. 일터를 잃은 근로자들이 꺼내든 건 불법파견 투쟁이었다. 지회는 고용부에 불법파견 진정을 접수했고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냈다. 2021년 12월 고용부는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회사에 시정명령을 내렸다. 울산지검도 HD현대건설기계와 서진이엔지 대표와 법인 등을 파견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불법파견 소송 선고는 소송을 낸 지 3년이 지나고 나서야 나왔다. 재판부의 판단은 근로자 승소였다.

법원 "원청, MES 시스템으로 작업 순서 정해"
 
재판부는 HD현대건설기계가 하청업체 근로자의 작업 방식과 순서를 결정했다고 봤다. HD현대건설기계는 사내하청업체와 작업표준서와 제조공정도, 표준작업지도서 등을 전달했고 근로자들은 이에 따라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작업실적 관리 시스템(MES 시스템)이 HD현대건설기계의 지휘감독의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작업표준서는 근로자들이 수행해야 하는 작업의 순서와 방식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어 HD현대건설기계가 사내하청업체 근로자에게 업무수행에 관한 구속력 있는 지휘명령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며 "작업 현장 모니터에는 MES 시스템이 송출됐고 근로자들은 모니터를 통해 현장에서 생산되는 부품의 종류, 기종, 공정 단계와 함께 생산 중인 기계장비의 모델명, 조립공정 투입 예정일, 투입 순서 등을 확인했다"고 했다.
 
이어 "HD현대건설기계는 작업표준서와 제조공정도, 표준작업지도서 등을 통해 구체적인 작업 방식을 정했고 MES 시스템을 통해 작업 대상과 작업순서를 정해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작업내용을 확정했다"며 "HD현대건설기계가 직접 관리하는 로봇공정에서도 하청업체 근로자들과 마찬가지로 MES 시스템을 통해 생산계획이 전달됐다"고 했다.
 
HD현대건설기계는 하청업체가 작업표준서를 임의로 수정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MES 시스템도 생산계획을 전달하기 위한 것일 뿐 하청 근로자가 시스템에 구속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펼쳤다.
 
그러나 재판부는 "하청업체가 작업표준서를 수정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작업표준서와 다르게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 경우 HD현대건설기계에 먼저 수정을 요청한 후 그 지시에 따라 작업했다"며 "MES 시스템을 통한 생산계획 전달은 사실상 구속력 있는 업무상 지시였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하청업체 근로자들이 HD현대건설기계 사업에 편입돼 있었다는 점도 인정했다. 사내하청업체 근로자의 작업공간과 HD현대건설기계의 작업공간은 구분돼 있었다. 다만 하청업체 근로자는 공장의 안전관리, 동력관리, 식당운영 등 효율성을 위해 HD현대건설기계 근로자와 동일한 시간에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원청 근로자들은 기술 이전, 품질 검수, 기계 수리 등을 이해 수시로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작업 공간에 출입했다.
 
재판부는 "사내하청업체 소속 근로자의 업무를 도급인인 피고 소속 근로자의 일반적인 업무 내지 영업 활동과 엄격히 구분 짓기 어렵다"며 "이 사건 각 사내하청업체의 근로자들이 피고 소속 근로자들에 비하여 특별히 전문성·기술성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고 했다.
 
"하청업체 설립에 원청 개입"...증거 명확했던 이유는
 
이번 판결에서 주목해 볼 부분은 재판부가 서진이엔지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HD현대건설기계가 은퇴한 임직원을 하청업체 대표로 추천하고 직접 하청업체를 설립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HD현대건설기계는 '임직원 창업 및 운영기준'에 따라 일정기간 근속한 임직원이 사내협력업체를 창업하는 경우 창업지원금을 지급하고 3~5년간 거래를 보장해 주고 있다. 서진이엔지 대표 석 모 씨도 HD현대건설기계에서 퇴직한 근로자였다. HD현대건설기계 부장은 석 씨를 협력업체 대표로 추천했고 석 씨는 회사로부터 창업지원금을 받아 서진이엔지를 설립했다. 서진이엔지는 기존 하청업체 근로자 고용을 그대로 승계했다.
 
재판부는 "HD현대건설기계는 석 씨를 대표로 추천하고 창업지원금을 지급하는 등 서진이엔지 설립 과정에서부터 관여했고 서진이엔지는 이전 협력업체 근로자들을 그대로 채용했다"며 "서진이엔지나 서진이엔지와 비슷한 경위로 도급계약을 체결했을 것으로 보이는 다른 협력업체들이 HD현대건설기계와 구분되는 독립적인 기업조직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불법파견 사건에서 원청에서 퇴직한 임직원이 하청업체의 대표인 경우는 다수 있다. 다만 하청업체 설립에 원청이 개입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사례는 드물다. 원청이 하청업체 설에 개입했다는 것이 인정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사 소송과 함께 형사 소송도 함께 진행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근로자 측을 대리한 강서진 전국금속노동조합 법률원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고용부에서부터 불법파견이 인정됐고 형사 기소까지 이루어져 회사 내부 문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며 "고용부의 불법파견 조사가 잘 이루어지면 하청업체의 기업적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설명했다.
 
다른 협력업체 추가 소송 가능성 있어...형사 재판도 주목
 
이번 소송은 현재 진행 중인 형사 재판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울산지법에서는 파견법 위반으로 기소된 HD현대건설기계 대표와 석 씨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울산지법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선고 기일을 열기로 했지만 선고 전날 돌연 취소하고 다시 기일을 지정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의 결과에 따라 판단하겠다는 이유다.
 
울산지법 재판부는 오는 4월로 공판기일을 다시 잡았다. 공판에서는 이번 판결의 결과에 따라 선고 기일을 다시 지정할지가 결정된다.
 
한편, 추가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도 있다. 서진이엔지를 시작으로 다른 하청업체 근로자들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어서다.
 
강서진 변호사는 "서진이엔지가 HD현대건설기계 사내하청업체 중 처음으로 불법파견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원청과 다른 하청업체들도 소송 가능성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소송 당사자인 이병락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지회장은 "서진이엔지 노동자들이 불법으로 노동 착취를 당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나오는 데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싸워야 할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싸워서 현장으로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이지예 기자 jyjy@elabo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