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클립아트코리아

[노동법률]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

연차는 근로자의 쉴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다. 기계도 열을 식혀 주지 않고 마냥 돌리면 고장이 난다. 기계가 아닌 사람은 반드시 충분한 휴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업무 시간이 길고, 연차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또는 않는) 근로자가 많다. 피로도가 축적되면서 근무시간 중 열의를 갖고 일하는 시간은 56%에 불과하고, 업무와 무관한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가짜 노동 시간의 비중은 24%에 달한다. 사회의 높은 피로도는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이 낮은 이유를 일정 부분 설명해 준다.
 

<표 1> 우리나라와 해외 국가의 주간 평균 근무 시간 및 노동생산성 비교
출처: World Population Review(n.d.), OECD (2024).

 
사업장의 경쟁력을 위해서는 근로자가 휴식을 통해 최상의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업주와 관리자가 직원의 연차 사용을 억제하는 상황이 이어졌고, 미사용 연차 보상 제도와 연차휴가 사용 촉진제도가 도입됐다. 제도의 취지는 최대한 연차 사용을 독려하고, 그럼에도 사용하지 못한 연차가 발생했을 때 보상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제도의 취지와는 반대로 악용되는 사례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제도의 악용은 노사 양측에서 모두 발생하고 있다.
 
1. 근로자의 제도 악용
 
근로자가 미사용 연차 보상 제도를 악용하는 경우는 이제 드물지만은 않다. 연차 보상 제도를 시행하지 않고 있으며 보상할 예산도 없어 휴가 사용을 최대한 독려하는 회사에서도 퇴사 후에 보상금을 요구하는 직원의 사례를 호소하기도 한다.
 
①연차 쓸 수 있어도 안 쓰는 근로자

미사용 연차를 돈으로 보상받을 수 있게 되면서 충분히 연차를 쓸 수 있는 상황인데도 쓰지 않는 근로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업무상 비수기가 있고, 사측의 공문과 부서장의 권고가 있었는데도 일부러 휴가를 사용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이런 근로자들과 소통할 기회가 있었는데, 본인들의 행동이 제도의 취지를 훼손하고 악용하는 것이란 인식 자체가 없었다. 본인이 휴가 안 쓰고 돈 받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것이 그들의 태도였다.

사측의 보상에 준하는 만큼 생산성을 내는 것은 근로자의 의무이다. 연차는 생산성 유지에 필요한 휴식 시간을 부여해 준다. 이런 연차를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피로도를 높여 업무 집중도와 생산성을 떨어뜨린 채로 일하는 것은 근로자 본인의 건강을 훼손하는 일이기도 하다.
 
②무단결근 따로, 연차 보상 따로인 근로자

근태 관리를 엄격하게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사업장에서 발생한 문제다. 휴가를 쓰지 않고 무단결근을 하면서, 나중에 연차를 쓰지 않았다고 보상을 요구하는 근로자도 있다. 심지어 퇴사할 때까지 수십 차례 무단결근을 한 뒤, 퇴사하면서 수십 일에 해당하는 연차 보상을 요구한 근로자의 사례도 있었다. 근태 관리를 시스템으로, 나름 엄격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사업장조차 출퇴근만 제시간에 찍고, 근무 시간 중에 이탈하는 방식으로 무단결근의 징계를 피한 직원을 경험한 사례가 있다.

물론 사업장이 근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책임이 있긴 하다. 하지만 설령 사업장이 관리하지 않는다 해도, 무단결근하는 것 자체가 근로자의 낮은 직업윤리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연차 보상까지 요구한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이다.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 중에는 임원급, 심지어 월급 사장도 있었다.
 
③연차 휴가를 썼으면서도 보상을 요구하는 근로자

직원의 근태를 일일이 시스템으로 관리하기 어려운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이런 사업장은 휴가 신청을 구두나 서면으로 하므로 조작하기 쉽다. 구두로 휴가를 신청한 것은 당연히 증거가 남지 않고, 서면으로 신청했다면 그 서류만 없애면 되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사업장조차 서면 신청서를 활용하면 그런 비위 행위가 발생하기도 한다. 근로자가 관리자에게 휴가를 쓰겠다고 해 서면 신청서에 서명까지 받았고, 휴가를 사용했으면서도 정작 서면 신청서를 인사 부서에 제출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미사용 연차 보상을 요구했으며 노동청에 신고하거나, 하겠다고 협박했다. 관리자와 사업주는 억울하게 보상금을 물어줘야 했다.
 
2. 사업주와 관리자의 제도 악용
 
사업주와 관리자의 사례 중에는 연차휴가 사용 촉진 제도를 악용하는 경우가 두드러진다. 공문 등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연차 사용을 촉진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정작 뒤에서는 직원이 연차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것이다.
 
①휴가 쓰고 출근하라는 사업주

관련 사례 중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200~300인이 근무하는 조직에서 사업주가 공문을 통해 여러 차례 연차 사용을 촉진한 뒤, 정작 직원들 앞에서는 휴가를 쓰고 출근하라고 지시했다. 해당 조직에는 미사용 연차를 이듬해까지 넘겨서 쓸 수 있는 제도도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업주의 눈치를 본 부서장들은 본인들부터 휴가를 쓰고 출근했고, 부서원 중 일부도 부서장의 눈치가 보여 휴가를 쓰고 출근했다. 휴가를 쓰고 출근하지 않은 직원들은 사업주의 눈 밖에 났으며, 그중 일부는 최하 수준의 근무 성적 평정을 받기도 했다.
 
②직원의 휴가에 중요한 일정을 잡는 관리자+휴가 취소를 거절하는 사업주

사례자는 연차 사용 촉진제에 따라 연말에 휴가를 사용할 날짜를 지정했고, 휴가를 신청했으며, 여행 일정도 계획해 두었다. 관리자는 사례자의 휴가 일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날짜에 사례자가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중요한 일정을 잡았다. 사례자가 휴가라서 참석이 어렵다고 하자, 잠깐 일정만 참여하고 다시 쉬러 가라고 했다. 사례자가 해외에 나갈 계획이라고 하자 관리자는 휴가 중에 여행 가는 사람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며 사례자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사례자는 눈치가 보인 탓에 여행 일정을 취소했으며, 사측에도 신청했던 휴가를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다가 사업주와 독대하게 됐다. 사업주는 직원들이 휴가를 너무 안 써서 걱정이다, 보상해 줄 예산이 없는데 휴가 신청했다가도 취소하니 사측이 너무 어렵다는 등의 말을 했다. 간접적으로 그냥 휴가를 쓴 것으로 하자고 권하는 말도 있었다. 사업주와 독대까지 한 상황에서 사례자는 휴가 취소를 강하게 요구하기 어려웠다.
 
③인사 부서에 직원 계정으로 휴가 기안을 올리도록 지시한 사업주

휴가가 남은 여러 직원의 계정으로 접속해 임의로 정한 날짜에 휴가 기안을 올리도록 인사 부서에 지시한 사업주도 있다. 직원들은 등록한 적도 없는 휴가 신청서가 제출돼 승인된 것을 보고 회사에 항의했으나, 사업주는 신청했으니 등록된 것이라고 잡아뗐다. 인사부서장은 사업주가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인사부서원 중 하나가 피해 직원과 친분이 있어 사실을 알려주긴 했으나, 피해 직원이 증언을 요청하자 거절했다. 객관적인 증거여야 할 시스템상의 조작이 이뤄진 데다, 증언을 확보할 수 없었기에 피해 직원들은 노동청에 신고하지 못했다. 피해 직원 중 일부는 원하지도 않는 날짜에 강제로 휴가를 썼고, 일부는 업무 일정과 맞지 않아 휴가 기간 중 출근해야 했다.
 
3. 제도는 선진적이나, 실행 방식은 그렇지 못한 우리나라
 
그간 우리나라에는 노사 이슈와 관련해 다양한 선진적 제도가 도입됐다. 또한 그런 제도의 시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업장에는 처벌적 조치가 가해지기도 했다. 모든 제도의 도입 취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 제도를 활용하게 될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도의 도입을 통해 사측은 연차 사용이 근로자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며, 사업주의 배려가 아님을 인식하도록 해야 했다. 노측은 연차 사용이 본인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근로자로서 생산성 유지 의무를 지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임을 인식해야 했다. 노사 양측의 인식 개선 없이 제도가 도입되면서 노사 양쪽 모두 제도를 악용하고, 노사 모두 피해자가 되고 있다.

차라리 미사용 연차 보상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다면 최소한 노측의 제도 악용은 피할 수 있었다. 근로자의 연차 사용을 억제하거나, 업무 조정을 해주지 않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사업장을 신고받아 과태료를 부과하는 일차원적인 제도만 실행했어도 지금보다는 더욱 제도의 취지에 맞는 환경 조성에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과는 달리, 연차 사용 억제는 행위와 결과가 명확하므로 신고를 통해 쉽게 입증하고, 쉽게 바로잡을 수 있는 영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업장의 연차 사용 권한 보장과 활성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면, 목표 달성에 해당하는 행위는 무엇인지, 그 행위를 강화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분석해서 실행해야 한다. 이런 분석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 사측이 표면적으로만 촉진 제도를 실행할 뿐 속에서는 전혀 문제가 개선되지 않은 사례들이 확인되고 있다. 동시에 보상받으려고 일부러 연차를 쓰지 않는 근로자의 사례도 확인되고 있다.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실행된 제도는 엉뚱한 행동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기에 앞서 해외 사례는 부지런히 연구했어도, 정작 그 제도의 영향을 받을 국내 직장인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거나, 그들의 집단지성을 활용하거나, 제도 도입 이후의 부작용에 대비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새로운 법령과 정책의 타당성을 해외에서 주로 찾았으며, 참고하는 국가도 거의 정해져 있다(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호주 등). 시행하고자 하는 법령이나 정책의 방향성에 적합한 나라를 찾아서 사례를 탐구한 것도 아니고, 그저 익숙한 해외 국가들의 사례에서 타당성 유무를 검토했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 실행될 법령인데 그 타당성을 문화도, 사람도 다른 해외 사례에서 찾는 것 자체가 과연 타당한 것일까? 앞에서 본 사례들은 '우리나라 일반인의 생각'을 배제한 결과가 어떤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