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클립아트코리아 [노동법률] 김설 청년유니온 위원장

근로자가 1000인 이상인 기업 중 70.3%가 호봉제를 채택하고 있는 가운데, 호봉제를 채택한 상시근로자 5인 미만 사업장은 7.2% 불과했다. 상시근로자 10~29인 사업장이 호봉제를 채택한 경우는 32.4%에 불과했다. 그리고 사업장 규모별 법정 정년이 적용되는 비율 또한 이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2020년 5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조사 고령층 부가 조사에 따르면 55~64세 연령대의 사람이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에서 퇴직할 때의 평균 연령은 49.4세에 불과하다. 베이비부머 세대 중에서 정년 연장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비율은 11.4%로 추정된다. 고학력일수록, 남성일수록, 100명 이상 기업에서 일할수록, 공공 부문에 종사할수록, 노동조합이 있는 곳에서 근무할수록 정규직으로 생존해 정년 연장의 혜택을 받을 확률이 높다. 거기에 더해 정년 연장이 청년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기업 규모별 임금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고,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의 이동은 어려워졌다. 대졸자는 늘어나고 있지만 대기업 채용은 정체돼 있다. 지난 정부는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정규직의 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 벽 안으로는 소수의 인원만 포용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정년 연장 논의는 정년이 있고 실제 작동하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이와 무관하게 생계를 위해 일하는 서민들의 실질적 정년은 이미 70세를 넘어선 지 오래다. 법정 정년 연장이 노동시장 불평등 해소와 노후 안전망을 확장하는, 즉 사회 정의와 공공의 선에 복무한다고 결코 확신을 갖고 답할 수 없다.

이렇듯 법정 정년이라는 안전망을 통해 연공급 혜택과 함께 더 안정적으로 오래 일할 수 있는 집단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에 더해 파견직·프리랜서·플랫폼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청년들은 과열된 노동시장의 경쟁에 밀려 더 일하고 싶은 의도와 달리 그냥 쉰다. 그리고 자식의 부양과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 가능할 때까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부모 세대의35.6%는 단순노무직이다. 건설·배달·청소·경비 등으로 일하며 존엄성을 시험받는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불평등의 벽을 강화할 것인가. 아니면 불평등을 낮추고, 노동조합법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길로 나아갈 것인가.

국민연금을 수령하는 시기가 2033년에는 만 65세로 늘어나는 가운데, 법정 정년과 연금 수령 시기사이에 발생하는 소득 크레바스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변화하는 인구 구조 가운데 늘어나는 노령 인구에게 더 나은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법정 정년을 늘리는 것은 일면 타당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노동시장 안에서 법정 정년을 연장하는 것은 강화되고 있는 노동시장의 구조적 불평등을 외면한 채 한쪽의 목소리만을 반영할 뿐이다. 

노년층의 취업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청년층의 취업자는 지속적으로 감소한다. 65세 이상 인구의 취업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배인 반면, 15~29세 사이 청년들 44만3000명(5.4%)은 '그냥 쉬었다'고 답했다. 청년들은 '그냥 쉬었음'의 상태가, 노년들은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한다'의 상태가 돼 간다. 지금 한국 노동시장의 단면이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청년들은 누적되는 실패 속에서 내일마저 좌절하는 상황에 놓여 있고, 노년은 충분히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지 못하는 가운데 가능한 오래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는 법정 정년을 연장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다툴 것이 아니라, 퇴직하고 노후를 편히 보내야 할 노년층이 경제활동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복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일자리를 두고 청년 고용이냐 정년 연장이냐 갈등하는 구조여서는 안 된다. 실질적인 연금 강화를 통해 실제 노년층의 소득을 보장하고, 노동시장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도입하고, 청년층의 고용을 확대할 수 있도록 조율해야 한다. 정년 연장이라는 하나의 안건만 두고 논의하는 것은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한다. 임금 체계, 공적연금, 신규 채용 연계 등을 종합적으로 다뤄야 할 것이다. 

'저성장 국면의 불평등과 양극화 시대'라는 타이틀은 지금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수식어다. 모든 위기의 징후가 사회 구성원들에게 질문한다. 이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기술 발전은 인류에게 더 긴 인생을 가져다줬다. 이것이 저주로 남을 것인지 축복으로 이어질 것인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