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클립아트코리아

[노동법률]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우리나라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ㆍ시행될 무렵, 영국의 낮은 산업재해 사망사고율과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 2007)'이 언론에 자주 소개됐다. 이는 중대재해처벌법이 기업살인법을 모티브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은 유럽연합(EU) 국가 중 산재 사망률이 낮은 국가에 속하며 이러한 성과가 강력한 처벌 법제 덕분이라는 시각이 있었다.

영국의 낮은 산재 사망사고율의 실제 배경

그러나 현실적 배경은 다소 다르다. 영국의 낮은 사망사고율은 법제도의 효과라기보다는 고위험 산업 비중의 축소에 기인한다. 1970년대 이후 인구는 증가했으나 제조업 종사자는 과거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고, 농업ㆍ임업ㆍ수산업 종사자도 70% 미만으로 감소했다. 건설업만 소폭 증가했을 뿐이다. 즉, 산재 사망사고율 하락은 고위험 산업 종사자 수 감소와 함께 나타난 구조적 현상이었다. 또한 공식 통계에서 제외되는 특정 직종(MoP 인력)의 연간 사망자 수를 포함한다면, 실제 산재 사망률은 발표치보다 훨씬 높아진다.
 
[그림 1] 영국 고위험 산업 종사자 수와 사망사고율 변화

재가공: ONS (2022). Time series explorer: UK workforce jobs SA.
HSE(2022a). Work-related fatal injuries in Great Britain.
HSE(2022b). Non-fatal injuries at work in Great Britain.
※산업별 종사자 수 단위는 천명, 사고율 단위는 만인율, MoP 인력 제외
 
<표 1> 영국 공식 통계에서 제외되는 직종의 사망자 수

출처: HSE(2022c). RIDFATAL - RIDDOR reportable fatal injuries by industry, accident kind, ageband and region.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기업살인법

영국에서는 '기업과실치사법(Corporate Manslaughter Act)'이 이미 1960년대부터 시행되고 있었으나, 실제 적용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후 한층 강화된 '기업살인법'이 제정된 배경엔 2005년에 발생한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당시 10대 소녀 두 명이 기찻길을 건너다 신호 오류로 인해 기차에 치여 사망한 것이다. 해당 사업체는 이미 4년 전 고위험성을 경고하는 조사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두 소녀의 사망으로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기존 기업과실치사법조차 적용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사회적 비난 여론이 거세지면서 결국 기업살인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기업살인법 역시 실제 적용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실효성이 낮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부풀려진 산업안전감독관 수

영국 산업재해 담당 기관인 HSE(Health and Safety Executive)에서 정식으로 채용ㆍ운영하는 산업안전감독관 수는 10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발표되는 통계에는 정식 산업안전감독관 수에 약 300~400명을 추가해 보고한다. 이 300~400명은 HSE 소속 정규 감독관이 아니라 다른 조직에 속한 객원 감독관에 불과하다. 이처럼 감독 인력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 전역의 모든 사업장을 철저히 관리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HSE는 위험도가 높은 산업군의 사업장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사업장의 자율 관리에 맡기고 있다.

목표설정형 산업재해 관리

영국의 산업재해 관리 체계는 기본적으로 목표설정형(Goal-setting Approach)이다. 이는 달성해야 할 목표만을 제시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구체적 방법은 사업장이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반면, 지시형(Prescriptive Approach)은 목표 달성을 위해 따라야 할 세부 지침까지 명시한다는 점에서 대조된다.

예를 들어, 목표설정형은 "노동자는 추락사고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라는 선언적 목표를 제시한다. 반면, 지시형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 1미터 이상 난간 설치, 모든 노동자 대상 안전교육 실시, 내부 설비 안전성의 정기 점검 등과 같은 구체적 지침을 명문화한다.

영국처럼 고위험 산업의 비중이 낮은 국가에서는 목표설정형 방식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모범 사례로 받아들인 뉴질랜드에서는 해당 방식을 적용한 이후 부실시공과 안전사고가 증가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렇듯 영국의 사례는 국내에 소개될 때 우수한 제도적 모범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영국 내에서는 제도의 실효성 부족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정책 방향이 자주 수정ㆍ변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간과한 채 영국의 제도를 매력적인 사례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영국 사례에서 참고할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법령과 정책 자체보다는 시행하는 방식에서 우리나라가 참고할 만한 점이 있다고 보고 있다.

문제 사업장에 부과되는 조사비용

첫째, 영국의 HSE가 문제 사업장을 조사할 때 적용하는 특징적인 제도는 조사비용을 해당 사업장에 부과한다는 점이다. 조사 결과 문제가 발견되지 않으면 사업장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지만, 위반 사항이 확인될 경우에는 시간당 약 30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HSE에 납부해야 한다. 조사가 장기화되고 복잡해질수록, 사업장이 부담해야 하는 조사비는 단순한 벌금보다 더 커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사업장 입장에서는 조사를 지연시키기보다 신속히 위반 사실을 인정하고 조사에 협조하여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오히려 재정적 손실을 줄이는 합리적 선택이 된다.
 
<표 2> 실제 제재 사례

출처: HSE Conviction History Register

위반 사항에 대해 각각 적용되는 높은 벌금
 
둘째, 위반 시 부과되는 벌금 자체가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점이다. 특히 위반 사항이 여러 조항에 해당할 경우, 각각의 조항별로 별도의 처벌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업은 단일 위반 행위로도 상당한 금액의 벌금을 중첩적으로 부담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조사비용까지 고려하면 기업 입장에서는 사후적 대응보다 사전적 예방조치가 훨씬 경제적이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높은 조사비와 벌금을 피하기 위해 산업안전보건 분야의 전문 인력을 채용ㆍ위촉해 안전 관리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비용 회피 차원을 넘어, 기업 생존과 경쟁력 확보를 위한 합리적 전략으로 작용한다.
 
<표 3> 제재조항 및 처벌 수준

출처: Health and Safety at work etc Act 1974, Health and Safety (Offences) Act 2008 From https://www.legislation.gov.uk/ukpga/2008/20/pdfs/ukpga_20080020_en.pdf(22 Jul 2022)
 
전문성 높은 산업안전감독관 양성 방식

영국 HSE에서 산업안전감독관으로 채용되는 인력은 주로 엔지니어링, 환경학, 보건학, 식품공학, 물리학 등 관련 학사 학위를 보유한 지원자들이다. 선발된 이들은 HSE에서 지정한 대학에서 2년간 대학원 수준의 교육을 받으며, 동시에 견습 감독관(Trainee Inspector)으로 근무한다. 이 과정은 PGDiploma(준석사 학위) 과정에 해당하며,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해야만 정식 감독관으로 임명될 수 있다. 과정 중 낙제할 경우 최대 2회의 재시험 기회가 주어지지만, 최종적으로 통과하지 못하면 정식 감독관 자격을 취득할 수 없다.
 
양성과정을 마친 정식 산업안전감독관은 Civil Servant(공무원) 신분을 부여받으며, 광범위한 관리ㆍ감독 권한을 행사한다.

- 사업장 출입권 : 근무 중 위험이 의심되는 사업장은 어느 곳이든 출입 가능하다.
- 수사ㆍ강제권 : 필요 시 경찰 동행을 요청할 수 있으며, 조사 및 감독에 필요한 장비ㆍ물품을 압수하거나 샘플을 채취할 수 있다.
- 소환권: 관련자 전원을 조사에 소환할 수 있다.
- 증거 보전권 : 사업장이 증거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지시할 권한이 있으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촬영 및 기록을 수행할 수 있다.
- 위험요소 조치권 :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물품ㆍ물질ㆍ장비를 즉시 제거하거나 조사할 수 있다. 다만, 법령에 따라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해당 물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제한이 명시돼 있다.
 
높은 전문성과 광범위한 권한을 보유한 HSE의 산업안전감독관들은 제도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정년까지 HSE에 근무하는 경우는 드물다. 산업안전보건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검증된 이들을 기업이 적극적으로 채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많은 감독관들이 일정 기간 경력을 쌓은 뒤 기업의 안전보건 담당 전문가로 이직한다. HSE의 입장에서는 인력 유출이지만, 산업 전반적으로는 우수 인력의 선순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영국의 산업안전 제도는 강력한 법적 장치와 목표설정형 관리 방식 등으로 국내에 선진적 사례로 자주 소개돼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위험 산업 비중의 축소라는 구조적 배경, 제한적인 법 적용, 감독 인력 부족과 같은 현실적 요인을 간과한 면이 있다. 이는 곧 타국의 제도를 참조할 때 단순히 '선진국의 성공 모델'이라는 환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국 제도의 무비판적 수용이 아니라, 국내 산업 구조와 제도적 여건에 맞는 부분을 취사선택하는 태도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많은 사업장이 제도 적응 과정에서 혼란과 부담을 겪었으며 중대한 사고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이는 강력한 법령만으로는 안전을 담보할 수 없음을 방증한다. 근본적인 안전불감증의 해소, 강력한 조사 절차 대비 강력하지 못한 처벌의 모순 개선, 우수한 감독관 인력의 확충과 같은 구조적 과제가 병행될 때 비로소 제도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외국 제도의 모방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실과 필요에 맞는 안전관리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