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KT 본사 사옥(사진=뉴시스)
 
노조가 조합원 총회를 거치지 않고 회사와 희망퇴직 합의를 했다면 불법행위에 해당해 조합원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희망퇴직 합의는 조합원 총회에서 의결하지 않는다는 노조 규약 개정은 무효라고 판단했다.
 
19일 노동법률 취재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2민사부(재판장 최누림)는 지난 14일 KT노동조합 조합원 A 씨 등 189명이 노조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노조 "희망퇴직은 총회 의결 사항 아냐"…법원 "규약 무효"
 
KT는 구조조정을 위해 지난해 10월 노조와 특별 희망퇴직에 합의하고 2800명을 희망퇴직시켰다. KT노조 조합원으로 구성된 KT민주동지회는 노조가 조합원 총회를 통해 동의를 받지 않고 회사와 희망퇴직을 직권 합의한 것은 불법행위라고 주장하며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2021년 3월 KT노조는 대의원대회를 열고 정기 임금 및 단체협약에 대한 사항만 조합원 총회를 거치고 그 외엔 조합원 총회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으로 노조 규약을 개정했다. KT노조는 이때 규약을 개정했기 때문에 절차 위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조합원들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KT노조의 규약 개정이 무효라고 봤다. 재판부는 "노동조합법 16조는 노조를 자주ㆍ민주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주요 사항을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총회가 의결하도록 하는 규정으로 강행규정"이라며 "2021년 3월 규약 개정은 헌법과 노동조합법을 위반해 조합원의 단체교섭과 의사결정 참여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기 임금 및 단체협약 외의 주요 사항을 의결 대상에서 제외한 2021년 3월 규약 개정은 무효"라고 판단했다.
 
법원은 노조 규약이 총회와 대의원대회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노조 규약이 총회와 대의원대회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며 "대의원대회가 총회에 갈음한다는 규정과 관행이 없음에도 대의원대회가 주요 사항을 총회 의결 사항에서 제외하는 결의를 한 것은 무효"라고 했다.
 
법원은 조합원에 대한 KT노조의 불법행위 손해배상 책임도 인정했다. KT노조는 희망퇴직 합의사항이 조합원들에게 유리하고, 조합원이 1만 명에 달해 조합원 총회로 의결할 수 없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조합원 총회를 거치지 않고 회사와 희망퇴직에 합의한 것은 문제"라며 "조합원 수가 1만 명이 넘고 전국에 분포돼 있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조합원의 절차적 권리가 박탈된 것이 참작될 수 없어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희망퇴직 합의가 그간 회사가 정기적으로 실시해 온 희망퇴직보다 근로자들에게 다소 유리한 면이 있더라도 노조의 손해배상 책임이 부정되지 않는다"며 "노조는 각 조합원에게 50만 원과 지연 이자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KT민주동지회는 이번 판결에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윤진수 KT민주동지회 의장은 "이번 판결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며 "회사와 KT노조가 야합해 진행한 구조조정이 그 어떤 정당성도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 판결"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KT와 KT노조 모두 이번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며 "KT 이사회와 노조 모두 쇄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재 KT민주동지회는 노조를 상대로 한 추가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KT민주동지회는 지난해 희망퇴직으로 피해를 입은 조합원을 대상으로 다음 달 15일까지 2차 소송인단을 모집 중이다.
 
총회 어렵다면 최소 '대의원대회'는 거쳐야
 
권두섭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정기 임금 및 단체협약이 아니더라도 희망퇴직과 같이 조합원의 권리, 의무에 직접적인 변동을 가져오는 사항은 조합원 총회를 거쳐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로, 선례가 없는 판결"이라며 "조합원의 권리ㆍ의무에 직접적인 권리 변동을 가져오는 사항이라면 노조 규약에 의결 사항으로 명시돼 있지 않더라도 총회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했다.
 
권 변호사는 "노조가 총회와 대의원대회 어느 하나도 거치지 않고 주요 사항을 회사와 합의하면 문제가 될 것"이라며 "총회를 거치지 않을 것이라면 최소한 대의원대회라고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규약에 총회에 갈음하는 대의원대회임을 명시하고 대의원대회 의결 사항으로 규정하면 노조의 민주적 운영이라는 원칙에 위배되지 않아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재헌 기자 jh59@elabo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