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셀 참사 피해자 대책위원회가 2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아리셀 중대재해참사 대법원 선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뉴시스)
배터리 공장 화재로 23명이 사망해 2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박순관 아리셀 대표에게 징역 4년이 확정됐다. 대법원은 안전보건관리책임자가 선임됐더라도 최종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업총괄책임자가 중대재해처벌법상 경영책임자로서의 의무를 면할 수 없고 위험성평가 절차를 마련한 것만으로 중대재해처벌법상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이같이 판단했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제1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박순관 아리셀 대표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산업안전보건법과 건축법 위반 혐의로 함께 기소된 박 대표의 아들 박중언 아리셀 운영총괄본부장에 대해서도 징역 7년과 벌금 1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고 아리셀 법인에 대한 벌금 8억 원도 확정했다.
'15년→4년' 감형한 원심, 대법서 '확정'
2024년 6월 경기도 화성시 아리셀 리튬 배터리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23명이 사망하고 8명이 다쳤다. 검찰은 박 대표를 중대재해처벌법상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의무 ▲유해⋅위험 요인 확인 및 개선 의무를 위반한 혐의로 기소하고 법 시행 이후 최고형인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1심은 박 대표가 중대재해처벌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해 법 시행 이후 가장 높은 형량인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1심은 "박 대표는 매출만 강조하고 근로자 안전에 대한 지시는 하지 않았다"며 "이미 여러 번의 폭발 사고를 경험했음에도 안전 조치를 하지 않아 근로자가 사망했다"고 했다.
그러나 2심은 박 대표의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의무 이행 노력과 유가족과의 합의를 고려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2심은 "박 대표가 안전에 관한 경영방침을 설정하고 평가 기준도 마련해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안전 문제를 완전히 외면하거나 방치했다고 볼 수 없다"며 "피해 유가족 전원과 합의한 점도 고려해 감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역시 박 대표가 중대재해처벌법상 경영책임자에 해당한다는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안전보건관리책임자가 따로 선임돼 있더라도 사업총괄책임자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은 "안전보건관리책임자가 지정돼 있더라도 사업총괄책임자가 최종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영역이 존재한다면 사업총괄책임자는 여전히 중대재해처벌법상 경영책임자로서 의무를 부담한다"며 "박 대표를 경영책임자로 본 원심 판단에 법리 오해가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산업안전보건법상 위험성평가 절차를 마련해 둔 것만으로 중대재해처벌법상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다는 점도 명확히 했다.
대법원은 "산업안전보건법상 위험성평가 절차 마련 의무와 중대재해처벌법상 유해⋅위험 요인 확인 및 개선 절차 마련 의무는 제도의 취지와 보호 대상이 다르다"며 "산업안전보건법상 절차를 갖췄다는 사정만으로 중대재해처벌법상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박 대표가 위험성평가 절차를 마련하긴 했으나 이를 실제로 이행하거나 결과를 보고받지 않았다"며 "형식적인 절차 마련만으로는 의무 이행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양형'은 상고이유 아니었지만…형량 두고 '갑론을박'
이번 판결에서 양형은 법률상 상고이유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1심(징역 15년)과 2심(징역 4년)의 양형 격차가 컸던 데다 최근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중대재해 범죄 양형기준을 제정한 직후 선고된 판결이라는 점에서 양형이 큰 주목을 받았다.
다만 원심 형량이 징역 10년 미만인 경우 양형부당을 이유로 상고할 수 없다는 형사소송법 규정에 따라 대법원에서는 양형 적정성에 대해 별도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판결 선고 직후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 판단을 강하게 비판했다. 유가족 이순희 씨는 "23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징역 4년이라니 억울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며 "기업인의 손을 들어준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유가족 측 대리인 신하나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양형이 상고이유가 아니어서 대법원이 판단하지 않을 것은 예견했지만 그럼에도 허망한 결과"라며 "23명 사망에 징역 4년이라면 피해자 1명당 2개월꼴이다. 이번 대법원의 상고기각은 하급심 재판부에 기업을 봐주고 양형을 낮춰도 된다는 신호를 준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양형위가 기준을 발표할 때부터 아리셀 사건도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며 "양형위가 사실상 아리셀 항소심 양형기준의 편을 들며 기준을 냈다. 피해자와 유가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양형기준과 대법원의 판단은 문제"라고 비판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도 판결 직후 성명을 통해 "이번 대법원 판단은 앞으로 법원이 중대재해처벌법을 해석하고 형을 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되는 판결"이라며 "대법원이 23명이 숨진 참사에도 징역 4년이면 충분하다는 판결을 내려 중대재해처벌법이 사실상 무력화됐다"고 지적했다.
반면 양형위원회 기준에 비추어 보더라도 원심 형량을 뒤집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전문가 의견도 나온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양형위 기준이 포괄적인 데다 이번 사건은 감형 요소 등 고려해야 할 인자가 많았다"며 "발표된 양형기준 권고 범위를 크게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분석했다.
이어 정 교수는 "인과관계 논증 관점에 따라 판단이 갈릴 수 있는 사건이었다"며 "피해 규모가 크다는 점이 가중 사유로 반영되더라도 원심보다 높은 형을 선고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재헌 기자 jh59@elabo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