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클립아트코리아

[노동법률]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
 
우리나라의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모든 신고에 대해 조사와 조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여기서부터가 해외 국가와 차이가 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해외에서는 적절한 신고와 부적절한 신고를 구분할 수 있도록 신고 인정 기준이 마련돼 있다. 국가별로 신고 인정 기준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기준들이 있다.
 
①신고된 행위가 상식적인 범위에서 괴롭힘으로 볼 수 있거나, 적정 범위의 행위를 넘어서는 것이며 ②행위가 지속ㆍ반복됐고 ③신고인이 괴롭힘이 실제로 발생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합리적인 증거만으로도 신고가 인정되는 경우부터 완전히 신고인에게 입증책임이 따르는 경우까지 국가에 따라 혹은 신고기관의 특성에 따라 입증책임에 차이는 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신고인에게 피해에 대한 증거가 요구된다. 여기서 활용될 수 있는 증거는 꾸준한 피해 상황의 기록을 포함한다. 그런 기록 없이 신고인의 증언만 있는 경우는 신고가 접수되기 어렵다.
 
위의 조건에 더해 추가적인 기준을 요구하는 국가들도 있다. 그 예시로 호주, 아일랜드, 벨기에를 들 수 있다. 단위 사업장의 기준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므로 행정기관의 신고 인정 기준을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호주, 괴롭힘 신고를 가장 인정받기 어려운 나라
 
호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형법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다루는 주 정부가 있는 나라다. 호주 빅토리아주(州)의 형법에 의거해 가해자는 최대 징역 10년에 처해질 수 있다. 이토록 엄격한 처벌 조항으로 인해 호주는 가장 괴롭힘 신고를 인정받기 어렵고, 피해를 인정받기도 어려운 국가로 꼽힌다. 가해자로 인정되는 것이 곧 전과자가 될 수 있으므로, 인정 기준이 매우 까다로워진 것이다. 엄격한 처벌 조항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피해율은 영국과 더불어 우리나라와 유사한 수준으로 높게 유지되고 있다. 동시에 허위신고의 심각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국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호주에는 괴롭힘 신고를 인정하는 기준부터, 신고 대응 절차까지 매우 세밀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돼 있다. 피해율이 높고, 사후구제 중심 제도를 운용하고 있고, 신고가 많으며, 괴롭힘 문제가 프랙티셔너들에 의해 시장화됐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괴롭힘 문제로 프랙티셔너들이 꾸준히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전문화되고 차별화된 서비스를 보여줘야 했고, 그 결과 매우 세밀한 대응 절차가 수립된 것이다. 피해율이 낮고 예방 중심 제도를 펴는 북유럽 국가들은 법령을 시행한 기간이 매우 오래됐음에도 오히려 신고 대응 절차가 모호한데, 이러한 점이 호주와 대조된다.
 
호주는 직장 내 괴롭힘에 대응하는 행정기관, 즉 우리나라의 노동청에 해당하는 조직이 없다. 사업장 신고 위에 바로 준사법기관인 위원회가 신고처다. 이 위원회에 신고하기 위해서는 위의 세 가지 기준에 더해 추가적으로 아래의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
 
④재직자만이 신고할 수 있다. 신고가 피해자의 자기 보호 수단이어야지 보복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⑤현재진행형 사건이며, 이후에도 괴롭힘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경우에만 신고할 수 있다. ⑥괴롭힘으로 인해 신고인에게 실질적 악영향이 있었다는 증거를 제출해야 한다(예 : 병원 진단서 등) ⑦신고비로 약 80 호주 달러를 지불해야 한다. 신고비는 매년 물가상승률 등을 반영해 증액된다.
 
이렇듯 총 일곱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만 신고할 수 있으므로 신고의 오남용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하지만 신고 인정 기준과 괴롭힘 피해 인정 기준이 워낙 까다롭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피해자가 구제받기 어려운 나라라는 비판을 자국의 전문가로부터 듣고 있다.
 
2. 6개월 이내에 신고해야 하는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재직자만 신고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두고 있진 않으나, 6개월 이내 사건만 신고를 접수할 수 있다. 그 기간 내에 신고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입증할 수 있으면 최대 12개월까지 연장되지만, 기본적인 신고 기간은 6개월이다.
 
아일랜드는 가해자의 반성과 피해자의 사업장 재적응을 징계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다. 따라서 정식 조사 및 조치보다는 가급적 화해와 조정을 중심으로 사건 대응이 이루어지고 있다. 피해자가 신고했어도 분리조치가 반드시 실행되진 않으며, 심지어 가해자와 계속 함께 일하기도 한다. 다만, 가해자가 추가적인 가해행위나 보복행위를 하지 않도록 상급자를 배정하여 모니터링하도록 한다.
 
아일랜드는 사업장 중심 대응을 우선시하며, 외부 전문가가 아닌 내부 상급자에게 사건의 조사와 대응을 맡기도록 가이드라인이 마련돼 있다. 국내에서라면 자칫 공정성과 객관성이 부족한 대응 방식이라고 인식되기 쉽겠지만, 아일랜드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이런 방식으로 사건에 대응하는 아일랜드의 피해율은 유럽연합(EU) 국가 중 중간 수준 정도이며, 호주보다 낮다.
 
3. 반드시 사업장 신고를 거쳐야 하는 벨기에
 
벨기에도 신고 인정 기준이 호주처럼 까다롭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조건 정도면 충분하다. 위의 세 기준을 바탕으로 전문 심리사회적 방지조언사가 신고 내용을 검토해 적절하다고 판단된 신고만 접수된다. 다만 사업장 신고를 먼저 거쳐야 행정기관에 신고할 수 있다. 사업장 내부의 신고를 거쳤음에도 조치를 해주지 않았거나, 신고 조치 절차에 위법성이 있었거나, 고용주가 담당 방지조언사의 연락처를 공유하지 않아 신고할 수 없었던 경우에만 행정기관에 신고할 수 있다.
 
위의 심리사회적 방지조언사는 벨기에 정부 차원에서 자격 수준을 정한 인력으로, 관련 분야의 석사, 1.5년의 전문 교육, 5년의 관련 경력이 있어야 자격을 신청할 수 있다. 벨기에의 모든 사업장은 규모와 무관하게 심리사회적 방지조언사를 고용ㆍ위촉해야 하며, 관련 법령에 따라 방지조언사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고용주가 방지조언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원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압력을 가할 수 없는 것이다. 고용주는 직원에게 사업장이 위촉한 심리사회적 방지조언사의 연락처를 공유해 피해가 발생하면 직접 방지조언사에게 신고하도록 알려야 한다.
 
벨기에의 피해율도 EU 국가 중에는 중간 수준 정도로 볼 수 있다. 과거에는 피해율이 높았으나 방지조언사를 활용한 예방 중심 정책을 통해 점진적으로 피해율이 완화돼 왔다.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특이점은 여성보다 남성의 피해율이 높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벨기에의 언론은 '남성이 여성보다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것에 민감해서'라는 해석을 붙였다. 문화 차이에 따라 성별 특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위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괴롭힘 금지법을 시행하는 국가들은 부적절한 신고를 걸러내고, 적절한 신고에 대해서만 조치하도록 해 행정력과 비용의 낭비를 막고 있다. 신고만 접수되면 무조건 조사 조치를 의무화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법령과 차이가 있다.
 
부적절 신고가 많다는 것, 신고를 수단화하고 악용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국내 현장에 있는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근로자들도 인식하고 있다. 또한 진(眞) 피해자 다수는 어떻게 신고를 준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괴롭힘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고 고통받고 있다. 괴롭힘 신고인정 기준을 객관화, 구체화하는 것은 피해자에게도 자신의 피해 상황을 어떻게 기록해 증거로 남겨야 할지 알려주는 지표가 되어 더욱 쉽게 피해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반대로 신고를 악용하는 사람을 걸러내기 쉬워진다. 신고 악용자들이 괴롭힘 피해의 객관적 조건을 충족해 보겠다고 억지로 허위 사실을 기록하여 꾸며내면 그땐 그들의 기록이 명백한 무고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신고인정 기준의 객관화, 구체화는 신고인정 기준을 까다롭게 하는 것과 다르다. 호주와 같은 국가의 사례만 봐도, 신고인정 기준이 까다로워진 배경에는 신고 악용 피해와 엄격한 처벌 조항이 있었다. 객관화, 구체화 자체가 신고인정을 어렵게 만들진 않았던 것이다. 동시에 객관화, 구체화된 기준을 통해 전문가들이 사건을 공정하게 판단하도록 돕는 장점도 있었다.
 
이미 명확한 기준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해서 괴롭힘을 판단하는 시기는 지났다. 수많은 법령의 판례들이 사건 판단 기준을 체계화, 객관화하고 있다. 이제 더 나아가 신고인정 기준을 세워 부적절한 신고를 초반에 걸러내고, 불필요한 조사 의무에 사업장과 정부의 행정력을 낭비하는 상황을 막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