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사진=이지예 기자)
업무상 질병 산재처리 지연에 대한 지적이 계속되자 고용노동부가 제도 개선을 약속했다. 업무상 질병 처리기간을 100일 이내로 단축하고 근골격계 질환은 45일에서 2개월 이내 처리하겠다는 것. 구체적 방안으로는 추정의 원칙 고시 제정과 확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 생략 질병 확대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나온다. 노동부의 답변에 구체적인 시행 시기나 계획이 빠져 있고 경영계 반발도 넘어야 하는 상황이다.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은 지난 22일 노동부가 산재처리 지연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 개선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업무상 질병 산재 처리 지연은 고질적인 문제로 손꼽혀 왔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공단은 노동자가 요양급여를 신청한 날로부터 7일 이내에 산재 여부를 결정해 신청인에게 알려야 한다.
다만 여기서 질판위 심의, 현장조사, 진찰, 서류 보완, 역할조사 등에 필요한 시간은 전부 제외된다. 질판위는 심의 의뢰를 받은 날부터 20일 이내에 심의해야 하고 부득이한 경우 심의 기간을 10일 연장할 수 있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2019년 질판위 평균 심의일수는 39.9일, 지난해는 35.3일이었다. 질판위를 거치는 사건 판정 개수가 증가하면서 심의에 소요되는 기간도 늘어나게 됐다.
그 결과 지난해 업무상 질병 판정 처리기간은 평균 172.4일이었다. 근골격계 질환 처리기간은 지난해 10월 기준 120.5일이다. 뇌심혈관계 질환의 경우 2019년 기준 156일이고 직업성 암의 경우 2018년 기준으로 341일이었다.
노동계는 업무상 질병 처리기간 단축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요구해 왔다. 금속노조는 지난해 11월부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투쟁을 시작했고 올해 4월부터는 울산에 위치한 공단 본부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도 지난 3월 근로복지공단 노사정 간담회서 업무상 질병 처리기간 단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노동부 "추정의 원칙, 고시로 제정...선보장 제도도 검토"
금속노조 투쟁 9개월째에 노동부가 답한 내용은 2가지다. 평균 업무상 질병 처리 기간을 100일 이내로 단축하고 근골격계 질환은 45일에서 2개월 이내 처리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부는 우선 추정의 원칙을 강화하고 질판위 심의 건수를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근로복지공단은 6개 다빈도 근골격계 질환에 대해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 작업기간이나 노출량 등에 대한 인정기준을 충족할 경우 반증이 없는 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한다. 인정 기준을 충족하지 않더라도 의학적 인과관계가 있다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한다. 이 경우 현장조사만 생략되고 질판위는 그대로 거치게 된다.
노동부는 처리 기간 단축을 위해 공단 지침으로만 정하고 있는 추정의 원칙을 고시로 제정할 계획이다. 추정의 원칙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추정의 원칙 대상 질병은 질판위 심의를 거치지 않고 공단 지사 차원에서 처리하도록 시행 규칙을 개정한다.
시행규칙 개정을 통해 질판위 심의를 제외하는 질병도 확대한다. 특별진찰 결과 업무 관련성이 확인된 경우에도 질판위는 제외하는 내용도 포함할 예정이다.
현재 시행규칙상 질판위를 생략할 수 있는 건 ▲진폐 ▲이황화탄소 중독증 ▲유해ㆍ위험 요인에 일시적으로 다량 노출돼 나타나는 급성 중독 증상 또는 소견 등의 질병 ▲공단이 진찰을 요구한 결과 업무와의 관련성이 매우 높다는 소견이 있는 질병 ▲산업안전공단 등이 업무와 관련성이 높다고 자문한 질병 ▲그 밖에 업무와 그 질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명백히 알 수 있는 경우로 공단이 정하는 질병이다.
질판위 외에도 재해조사에 소요되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안도 나왔다. 노동자가 산재 신청을 하면 공단이 사업주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10일 이내 사업주 의견을 청취하도록 하는 시행규칙도 삭제될 것으로 보인다. 또 공단 지사 차원에서 하는 의학자문을 생략하고 승인 전 치료 범위를 확대한다.
금속노조는 "애초 금속노조가 요구했던 '산재 신청 후 1개월 내 처리'에는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답변이지만 지난 십수 년 동안 켜켜이 쌓여왔던 처리 지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한 발을 내딛는 성과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노동계가 주장하는 '선보장 후평가 제도' 도입에 대해서도 연구 용역을 진행한다. 선보장 후평가 제도는 노동자가 산재 신청을 한 경우 먼저 급여를 지급하고 그 후에 업무 연관성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다. 사후에 업무상 질병이 아니라고 판명이 나면 공단은 급여를 회수하게 된다.
한국노총과 금속노조는 선보장 후평가 제도가 산재 처리 지연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김광일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본부장은 "선보장 후평가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기간 문제는 드러나지 않게 된다"며 "다시 급여를 회수하는 문제는 근로복지공단 대부금 제도도 있고 이행보증보험 등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고 설명했다.
금속노조도 "일하다 다치고 병든 노동자가 즉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생계 걱정 없이 치료가 가능하다면 노동자들에게 너무나 높은 산재보험 문턱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부 계획, 실현될까...경영계 "합의 안 된 내용"
한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나온다. 실현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일부는 단기간에 처리하기 쉽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 답변은 노동부가 금속노조에 공식적으로 보낸 답변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행 계획과 시기가 정해진 수준은 아니다. 노동부 관계자는 산재 처리 절차 개선 목표를 제시하고 논의 중인 내용에 대해 답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추정의 원칙 고시 제정과 사업주 의견 청취 시행규칙 삭제는 올해 안에도 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시행규칙 개정이 필요한 내용은 내년이 될 수도 내 후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 노동계 관계자도 "평균 일수를 줄일 수 있게 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 기간이 될 수 있을지는 봐야 한다"며 "다 이뤄지는 건 쉽게 될 것 같진 않다"고 예상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경영계 반대가 있다. 경영계는 산재 처리기간 단축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공감하면서도 산재보험 제도 목적 중인 하나인 '공정성'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추정의 원칙을 확대하고 질판위를 축소하는 방안에는 부정적 입장를 보이고 있다.
임우택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안전보건본부장은 <노동법률>과 통화에서 "처리기간 단축과 관련된 부분들은 노사가 협의하고 줄일 필요성이 있는 부분은 줄여나가야 할 텐데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기준에 관해서 추정의 원칙 고시 제정이나 이를 확대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경영계는 동의한 바 없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경영계는 이미 현재 시행 중인 추정의 원칙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처음 추정의 원칙이 도입될 당시 경영계 의견은 배제됐다는 것.
임 본부장은 "추정의 원칙 자체가 그전에도 합의 없이 이뤄지고 그 기준도 이미 과도한 부분이 있다고 보는데 고시 마련이나 판정위원회 처리 제외는 앞으로 쟁점이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선보장 후평가 제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답을 내놨다. 임 본부장은 "이 제도는 그 전에도 많이 논의됐지만 실현가능성이 없고 산재보험 취지랑 맞지 않는다"며 "산재보험은 업무관련성 평가를 통해 관련 부분에 대한 산재가 승인되는 부분인데 선보장은 업무 관련성 평가라는 근본적인 원칙에 어긋날뿐더러 산재보험 승인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경영계는 절차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노동부가 제시한 내용은 이미 지난 3월부터 근로복지공단 노사정 간담회서 함께 논의하던 내용이다. 공식적으로 심의나 의결이 이뤄지는 회의체는 아니지만 노사정은 산재보험 제도 개선을 의제로 매달 의견을 나눠 왔다.
그러나 참여 주체인 한국노총 담당자도 경총 담당자도 노동부가 금속노조에 답변을 보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임 본부장은 "추정의 원칙이라든지 근골격계 질병 처리 기간을 줄여나가는 부분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어떻게 협의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합의를 안 한 부분에 대해 일방적으로 정책 추진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노사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라며 "경영계 쪽도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보완책을 강구하겠다"고 답했다.
이지예 기자 jyjy@elabor.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