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전경(사진=뉴시스) 또다시 등장한 '실질적 지배력설'이 이번엔 현대제철과 한화오션이 하청노조의 노동조합법상 사용자로서 교섭 의무를 부담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이미 CJ대한통운 사건에서 같은 취지의 판단을 한 바 있어 이번 판결로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판결례가 또 쌓였다.

이번 판결은 전통적 제조업 사업장에서 나온 판결이라는 점에서 철강ㆍ조선업계, 나아가 제조업 전체에 파장이 예상된다. 제조업의 경우 각 공정이 유기적ㆍ연속적으로 결합돼 있어 공정을 독립적으로 분리해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원청이 하청 근로자에게 하는 업무 지시도 구체적이고 매뉴얼화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하청 근로자에 대한 원청의 사용자성이 인정될 가능성이 크다.

당정이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ㆍ3조 개정) 입법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노동조합법상 사용자 개념에 실질적 지배력설을 포함해 사용자성을 확장하자는 쪽으로 입법 논의가 진행 중이다. 다만, 노란봉투법이 통과되더라도 교섭의제별로 실질적 지배력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 기준이 모호해 이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29일 노동법률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제3부(재판장 최수진)는 지난 25일 현대제철이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판정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같은 날 선고된 한화오션의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판정 취소 소송에 대해서는 원고 일부 패소 판결했다.
 
현대제철 부노 '인정'…"하청 산업안전 원청과 교섭"
 
현대제철 하청 근로자들로 조직된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는 2021년 원청인 현대제철에 ▲하청 근로자 산업안전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 시정 ▲불법파견 근로자 정규직 전환 ▲자회사 채용 중단 의제에 대해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현대제철은 교섭 의무가 없다며 교섭을 거부했다.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는 현대제철의 교섭 거부가 부당노동행위라고 주장하며 충남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했다. 충남지노위는 구제신청을 기각했고, 중앙노동위원회는 교섭 의제 중 '하청 근로자의 산업안전'은 원청의 사용자성이 인정된다며 일부 인용 판정했다. 중노위 판단에 불복한 현대제철은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중노위에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제조ㆍ건설업 분야에서 다면적 노무 관계가 많이 발생하고 특히 사내하청은 규모가 영세하고 사무실도 없이 원청의 사업장에서 일을 한다"며 "하청업체가 단독으로 근로조건을 지배ㆍ결정할 수 없어 하청교섭만으로 근로조건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하청 근로자의 산업안전에 대한 현대제철의 실질적 지배력을 인정했다. 현대제철이 하청 근로자의 산업안전에 대해 교섭 의무가 있다는 판단이다. 하청 근로자들은 현대제철 당진공장에서 정비ㆍ조업ㆍ운송ㆍ크레인 운전 업무를 담당했다. 법원은 "하청 근로자들이 담당한 업무는 대부분 원청의 지시로 작업이 이루어지고, 이상 발생 시 원청에 보고하는 구조였다"며 "업무 특정상 원하청의 안전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어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한화오션, '성과급ㆍ노동안전'은 교섭해야"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도 원청인 한화오션에 ▲성과급 지급 ▲학자금 지급 ▲노조 활동 보장 ▲노동안전 ▲취업 방해 금지 등에 대한 교섭을 요구했다. 한화오션 역시 교섭 의무가 없다며 거부했다.

경남지방노동위원회는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의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기각했고, 중노위는 "한화오션은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가 하청 근로자의 노동조건에 대해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경우 성실히 단체교섭에 응해야 한다"며 교섭 요구 거부는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한화오션이 하청 근로자의 성과급 지급, 학자금 지급, 노동안전 등 세 가지 의제에 대해 교섭 의무를 가진다고 판단했다. 이 세 가지 의제에 대해선 한화오션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ㆍ결정할 수 있는 지위 있어 교섭 의무를 부담한다는 판단이다. 다만, 노조 활동 보장, 취업 방해 금지 등 두 가지 의제에 대해선 사용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화오션이 성과급, 학자금 총액을 결정해 이를 하청업체에 교부하면 하청업체가 다시 그 소속 근로자에게 근속연수에 따라 성과급ㆍ학자금을 지급했다. 법원은 "하청업체는 성과급, 학자금을 별도의 재원으로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한화오션이 수요 조사를 통해 성과급, 학자금의 지급 총액을 결정해 지급해 준 돈으로 소속 근로자에 대한 성과급과 학자금을 전액 충당하고 있다"며 "하청 근로자에 대한 성과급과 학자금 지급에 대해 한화오션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노동안전과 관련해 "조선업의 제조 공정은 하도급 구조하에 원청과 하청의 작업이 긴밀하게 연계돼 수행되는 특성을 가지므로, 하청 근로자에게 중대재해나 안전사고가 발생하는 경우 원고 회사 소속 근로자들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며 교섭 의무를 인정했다.
 
'실질적 지배력설' 또 나왔다
 
현대제철과 한화오션 두 판결의 공통 주인공은 실질적 지배력설이다. 두 판결 모두 실질적 지배력설을 근거로 나온 판결이다. 실질적 지배력설은 명시적이거나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없더라도 근로조건에 대해 실질적ㆍ구체적 지배력과 결정권이 있다면 노동조합법상 사용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견해다. 노무제공계약이 없어도 근로조건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인정되면 노동조합법상 사용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010년 대법원은 현대중공업 사건에서 "묵시적 근로계약 관계가 없더라도 하청의 근로조건을 실질적ㆍ구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면 지배ㆍ개입의 부당노동행위에서 사용자성이 인정된다"며 실질적 지배력설을 처음 인정했다.

다만 이때 인정된 건 '지배ㆍ개입'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원청 사용자성으로, 현대제철과 한화오션 판결은 '교섭 거부'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CJ대한통운 사건도 교섭 거부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한 판결이다. 대법원에서 교섭 거부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한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박은정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는 "실질적 지배력설에 따라 원청의 사용자성 개념이 넓어지는 상황에서 지배ㆍ개입의 부당노동행위에서만 원청의 사용자성이 인정될 필요는 없다"며 "원청의 단체교섭 의무가 확장된 만큼 부당노동행위 책임도 당연히 확장되는 것이 맞고, 이번 판결은 이 부분을 확실히 짚어준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원청의 사용자성이 교섭 거부의 부당노동행위까지 확대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오용수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교섭 거부의 부당노동행위에까지 실질적 지배력설이 인정된 것은 향후에 큰 문제를 만들 수 있다"며 "교섭 거부의 부당노동행위가 인정됐다는 것은 인정된 교섭의제에 대해 노조가 쟁의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해 기업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은 실질적 독립성을 갖추고 있는 '제조업' 하청업체에 대해서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용문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는 "CJ대한통운 사건은 택배 업종의 특수성이 고려됐고, 하청업체인 위탁 대리점이 실질적 독립성을 갖췄다고 보기 어려웠다"며 "이번 사건은 조선업과 철강업이라는 전통의 대규모 제조업에 대한 판결이고, 하청업체가 독립성을 갖추고 있는 경우에 해당해 판결의 의미와 파장이 더 크다"고 설명했다.

다만 같은 제조업이라도 하청업체가 복수의 원청과 도급계약을 체결한 경우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오 변호사는 "이번 사건처럼 하청업체가 특정 원청과만 거래하는 경우엔 법원이 구체적 타당성 측면에서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하청업체의 거래 상대방이 복수인 경우에는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청 안전조치 시 원청 지배력 인정?…"신중해야" 지적
 
이번 판결에서 또 한 가지 공통점은 '산업안전(노동안전)'에 대한 교섭 의무를 인정했다는 점이다. 현대제철과 한화오션은 자신들이 수행한 각종 산업안전 조치가 산업안전보건법, 중대재해처벌법 등을 이행한 것에 불과해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두 판결에서 "이 사건 사업장의 설비, 작업 내용, 작업 방식, 작업 일정 등 이 사건 사업장 내에서 근무하는 모든 근로자들의 안전과 관련한 요소를 지배ㆍ통제하고 있는 이상, 원청이 하청업체에 대한 안전 관련 지침을 마련하거나 그 이행을 감독하는 것이 관련 법령에 따른 도급인의 의무 이행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 원청의 실질적인 지배력이 부인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렇다면 원청이 하청 근로자에 대한 법상 산업안전 조치를 한 것만으로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아니라고 봤다. 김 변호사는 "이번 판결만으로 원청이 하청 근로자에 대한 법상 안전조치의무를 다했다고 해서 일률적으로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하청 근로자에 대한 안전조치의무 이행에 대한 판단과 실질적 지배력에 대한 판단은 별개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법상 하청 근로자에 대한 하청업체의 안전조치의무가 원청의 의무보다 많다"며 "원청은 보조적인 의무로서 안전조치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 사건과 달리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결론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오 변호사는 "하청 근로자에 대한 원청의 안전조치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법 자체가 일정 부분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서도 "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고 해서 하청 근로자의 산업안전에 대해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을 '당연히'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오 변호사는 "하청 근로자의 산업안전이 원청의 교섭의제로 인정되면 원하청 중 안전 비용을 누가 더 지출할 것인지에 대해 추가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비용 떠넘기기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하청 근로자에 대한 원청의 안전조치의무 규정이 노동조합법상 사용자 개념 판단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문제 제기가 예전부터 있었지만 고용노동부가 이를 방치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준희 광운대 법학부 교수는 "산업안전보건법상 원청의 안전조치의무가 단체교섭 상대방으로서의 사용자 개념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문제 제기가 오래 전부터 꾸준히 있었지만 고용부가 그럴 염려가 없다고 계속 반론을 제기해왔다"며 "결국 고용부가 이 같은 혼란을 조장한 결과가 됐다"고 비판했다. '노란봉투법' 실질적 지배력설 판단기준 마련될까
 
이번 판결은 현재 당정이 추진 중인 노란봉투법과 같은 취지의 판결이기도 하다. 실질적 지배력설을 통해 노동조합법상 사용자 개념을 확대한 노란봉투법은 당정이 이번 7월 임시국회에서 처리를 추진하면서 입법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다.

김유정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실질적 지배력설에 따른 원청 사용자성을 법원 판결로 기다려야 한다면 노동자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며 "이제는 판결이 아닌 노란봉투법으로 권리가 보장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다만 노란봉투법이 통과되더라도 원청의 사용자성 분쟁이 일거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 해결을 위해 실질적 지배력을 판단하는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지만 현실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박 교수는 "노란봉투법 통과만으로 원하청 분쟁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며 "실질적 지배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인 기준을 만드는 것이 대안으로 제시되겠지만, 각 사업장의 특성을 반영해 기준을 만드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고 한번 기준이 정해지면 기준 안에 들어가지 못한 하청 근로자들의 노동3권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법원도 실질적 지배력 범위를 놓고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법원은 "그러한 문제가 있다는 사정만으로 단체교섭 의무를 부담하는 사용자의 개념을 '근로조건에 대한 실적질 지배력 여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단체교섭의 상대방인 사용자의 판단기준인 '실질적 지배력' 또한 구체적 사안에 관한 판단 사례가 축적되면서 점진적으로 개념이 구체화되고 법리가 정립될 수 있다"며 "노동3권은 단지 선언적으로 존재하는 권리가 아니라, 법률의 규정이 없어도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이번 판결이 확정된다면 당분간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되는가 여부에 대한 판단이 재판부별로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어 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며 "결국 판결이 말한 것처럼 법원 판결이 축적돼 귀납적으로 판단 기준이 정립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시행령을 통해 교섭의제별로 원청의 교섭 의무를 정하자는 의견도 나오지만 이 역시 우려가 따른다. 이김춘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사무장은 "정부가 시행령을 통해 원하청 교섭의제를 정하면 하청 노동자들의 노동3권이 제대로 보장될 수 없다"며 "고용노동부 입맛에 맞게 교섭의제가 누더기로 정해질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도 "정부가 세부사항을 시행령으로 규정하더라도 결국 법원 판단이 필요한 사항이 지속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시행령으로 세부사항을 규정하는 방안이 실효성이 있을지 회의적이다"라고 했다. 시행령보다는 고용노동부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 변호사는 "시행령을 통해 일률적으로 원하청 교섭의제를 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며 "고용부가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내는 것을 현장의 혼선을 줄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재헌 기자 jh59@elabo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