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노동법률)
 
스타트업에서 일한 최고기술책임자(CTO)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회사가 근로계약서를 통해 CTO의 업무 내용과 근로시간을 명시했더라도 실질적인 업무 재량성이 높았다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11일 노동법률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제1부(재판장 양상윤)는 지난 10월 31일 반도체 스타트업 A 사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 구제 재심판정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근로계약서 쓴 CTO…"형식에 불과해 근로자성 부정"
 
반도체 스타트업 A 사는 역량 강화를 위해 개발자 B 씨를 CTO로 영입했다. B 씨는 회사에서 대표이사 다음으로 높은 직위를 부여받았고, 보수도 일반 근로자보다 많이 받았다. 회사는 B 씨에게 회사 주식의 5%를 지급하기도 했다.
 
문제는 회사가 B 씨를 해임하면서 발생했다. B 씨는 자신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며 회사의 해임이 부당해고라고 주장하며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했다. 서울지노위는 B 씨를 근로자로 인정해 부당해고라고 판단했다. 중앙노동위원회의 판단도 같았다.
 
이에 회사는 중노위를 상대로 법원에 부당해고 구제 재심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법원은 중노위와 달리 B 씨가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B 씨는 근로계약서에 근로시간, 장소, 업무 내용이 상세히 기재돼 있어 근로자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근로계약서상으로는 근무시간, 장소, 업무 내용이 상세히 기재돼 있으나 실제 근무 시 이에 구속되지 않았다"며 "B 씨가 재량권을 가지고 근무해 근로계약서 내용만으로 근로자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B 씨가 CTO로서 대표이사와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지위에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B 씨는 명칭만 임원이 아니라 실제 업무 과정에서 대표이사와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지위에 있었다"며 "대표이사가 B 씨의 업무에 대해 구체적인 지휘ㆍ감독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B 씨에게 지급된 보수의 특수성도 고려됐다. 회사는 B 씨에게 일반 근로자와 다른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고 회사 주식도 직접 지급했다. 재판부는 "B 씨는 다른 근로자들과 임금, 업무 자유도에 있어 현저히 다른 대우를 받았다"며 "B 씨가 회사의 주식을 받고, 이후 회사에 상당 금액을 투자하려고 한 점을 고려할 때 지급된 보수가 근로의 대가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B 씨는 자신이 회사 이사회에 실제 참여한 적이 없어 근로자성이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소규모 회사라는 점을 고려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B 씨가 등기 이사임에도 실제 이사회에 참여하지 않은 점이 근로자성 판단에 고려될 수 있지만 회사가 상법상 이사회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자본금 2000만 원 미만의 소규모 회사였다"며 "이사회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근로자성이 인정될 수 없다"고 했다.
 
상법상 이사회 설치 의무는 자본금 총액이 10억 원 이상인 회사에만 적용된다. 자본금 총액이 10억 원 미만인 회사는 이사회 설치 의무가 면제된다.
 
회사가 B 씨의 보수에서 근로소득세를 원천 징수하고 4대 보험에도 가입시켰지만 근로자성 인정 징표가 되지는 못했다. 법원은 "회사가 근로소득세를 원천 징수하고, B 씨를 4대 보험에 가입시켰지만 이는 사용자가 우월한 지위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라며 "이것만으로 근로자성을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B 씨가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아 근로기준법상 해고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부당해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분 참여 확대ㆍ이사회 참가' 시 근로자성 약화
 
스타트업이 임원의 근로자성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는 계약의 형식과 실질적인 운영 모두에서 근로자와 구분되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임인영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임원의 근로자성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근로계약서가 아닌 임원 위임 계약서를 작성하고 실제 업무 수행 과정에서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담당 업무에 대해서는 전결권을 부여하고 소관 부서 인사와 예산 집행에 관한 실질적인 권한이 부여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임원에게 지급된 보수가 근로의 대상적 성격을 갖지 않도록 보수 체계를 설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고정급보다는 변동급을 늘리고 지분 참여 기회를 부여하면 근로자성이 인정될 가능성이 적어진다.
 
임 변호사는 "고정급은 근로의 대상적 성격이 강해 고정급보다는 경영 성과에 연동되는 성과급의 비중을 늘리는 것이 근로자성 리스크를 줄이는 방안"이라며 "주식 매수 선택권, 양도 제한 조건부 주식(RSU) 등 지분 참여 기회를 부여해 투자자적 지위를 강화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에서는 쟁점이 되지 않았지만 자본금이 10억 원 이상이어서 이사회 설치 의무가 있는 기업의 경우 임원의 이사회 참여 여부도 근로자성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임 변호사는 "대법원은 임원이 회사 경영을 위한 의사결정에 참여했는지 여부를 근로자성 판단 징표 중 하나로 보고 있다"며 "상법상 이사회 규정이 적용되는 기업은 등기이사의 이사회 참석 및 의결권 행사 내역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이 향후 분쟁 방지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했다.
 
이재헌 기자 jh59@elabo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