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1-05-13 15:53:30 수정 : 2021-06-01 14:51:42

님아 그 체면을 건드리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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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호 vol.361]

▲영화 '달콤한 인생'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월간노동법률]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폭력조직 행동대장 이병헌이 자신의 보스인 김영철에게 총을 들이대며 절규하듯 묻는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정말 모르겠거든요? 말 해봐요!" 김영철이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그 답이 명작이어서 아직도 종종 회자된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김영철의 대사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는 한국인에게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어떤 모욕감을 줬는지, 왜 모욕감을 느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김영철은 모욕감을 느꼈고 이병헌은 죽어야 한다. 한국인은 체면에 살고 체면에 죽는다.

오늘날 우리는 어떨까. 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앞의 세대들은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같은 표현을 많이 썼다. 우리도 비슷한 표현을 쓰지 않는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영화 베테랑 中)
 

▲영화 '베테랑'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인간은 체면을 유지하려 굉장히 애를 많이 쓴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선구적인 연구에 의하면 체면이란 '개인이 자신에 관해서 주장하는 긍정적인 사회적 가치'이다. 아시아문화권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이며 특히 대인관계의 지배적 요소이다.

체면에 관한 연구는 역사도 오래됐고 종류도 다양하다.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따라 개인에 따라 체면에 관한 의식과 반응도 각기 다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있다. 인간은 대개 체면을 차리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체면유지이론'이다. 인간은 사회 혹은 개인이 만들어놓은 체면의 기준, 이미지를 지키려고 애쓴다. 그 애쓰는 정도 또한 서로 달라서 모욕감을 느껴도 그런가 하고 넘어가는 이가 있는 반면 '달콤한 인생'에서처럼 죽이려 드는 일도 있다. 이는 '체면민감성'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직장에서의 체면 문제
 
우리 일상에서 체면민감성이 높아지는 대표적인 현장은 회의실, 협상장이다. 협상 도중 체면을 손상 당했다고 느낀 상대가 손해를 감수하고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협상전문가 조슈아 와이스(Joshua N. Weiss)는 이익, 계산을 잣대로 협상에 임하면 필패한다고 했다. 상대의 체면에 더 많은 관심을 쏟으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지사항을 강조했다.

첫째, 모든 협상에서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라. '이건 그냥 넘어가도 되겠지' 안심하고 말을 내뱉는 순간 생각지 못한 곳에서 협상이 어그러진다.

둘째, 제시된 해법의 유용성이 아닌 체면민감성 측면에서 살펴보라. 아무리 유용해도 체면을 건드리면 협상은 이뤄지지 않는다.

셋째, 모든 관계자의 체면을 고려하라. 어려운 협상을 풀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어렵지만,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넷째, 협상 도중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면 혹시 내가 상대의 체면을 건드린 게 아닌가 떠올려라.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돼'라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마라. 체면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일상에도 체면은 매우 중요하다
 
조슈아 와이스가 제시한 주지사항을 우리 일상에 한 번 적용해보자. 타인의 체면을 건드리지 않고 원활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첫째, 단어 하나가 체면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것을(주로 단어 하나가 상대의 체면을 건드린다는 것을) 주의하라. 영화 '아이리시맨'에서 앤서니 프로벤자노(스테판 그레이엄 분)가 지미 호파(알 파치노 분)를 죽일 마음을 가지게 된 직접적 계기는 '이런 인간들'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둘째, 일상과 직장에서 판단의 잣대를 합리성, 유용성으로 삼지 말라. 대개의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의해서 움직인다. 직장, 음식점, 길거리, 대중교통 같은 곳에서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충동, 욕망, 체면 같은 것들이다.

셋째, 부하. 그 중에서도 최말단 사원의 체면(감정)을 손상하지 말라. 옛 속담에 틀린 말 하나 없다.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하는 법이다. 요즘 그 체면 잘못 건드렸다간 큰 코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패가망신한다.

넷째, 체면을 건드렸다 싶으면 '지는 게 이기는 것'이란 격언을 떠올려라.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무식의 시대는 옛적에 끝났다. 감정과 행동을 자제하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기품의 시대이다. 아차 싶으면 우선 사과를 하고 함께 부딪혔더라도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좋은 습관을 이 기회에 길러보는 것은 어떨까.

 
부하 체면을 건드리면 조직에 손해
 
모 공공기관 신입직원 A가 갑자기 사직했다. 조직개편 논의가 진행되던 중 선배 B가 '니 자리 없어지면 어떻게 하냐'고 남 일처럼 말을 툭 뱉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A의 체면을 건드렸다. 그날 퇴근하면서 A는 "내일부터 관두겠다" 했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말 툭 뱉은 B는 주변으로부터 경솔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한동안 A의 민원업무를 대신 해야했다.

한국의 요즘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다르다(어느 세대야 안 그랬겠냐마는). 이 회사가 아니면 안 된다든가 평생직장이라든가 하는 관념이 없다. 오히려 여러 직장에서 여러 직위를 경험해본 이의 경력을 우대한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체면을 건드린다면 관두면 그만인 것이다.

다시 모 공공기관 얘기로 돌아가서. A가 담당했던 민원업무는 게으른 전임자가 오랫동안 맡아 비참한 수준으로 방치되다시피 했었다. A는 성실하고 깔끔한 업무로 정평이 났다. 이용시간 공지 안내판, 업무절차 안내도는 A가 디자인, 출력해 붙인 것이다. 규정에 없는 것을 설득하고 직접 주문, 제작해 민원실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켰다. 그런 A가 B의 무심한 말 한 마디로 관두었을 때 많은 이들은 이 기회에 B도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유능한 A는 나가고 무능한 B는 그대로 남았다. B는 한술 더 떠서 A의 일을 대신해야한다는 핑계로 본래 자신의 일에서 손을 떼다시피 했으니 조직으로서는 손해도 이런 큰 손해가 없다.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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